정규재 <논설위원ㆍ경제교육연구소장 jkj@hankyung.com>

산업은행에는 유능한 인물이 많다. 정부와 함께 국제 금융시장에서 활동해온 경험들이 쌓여 있다. 외국 금융사들이 산업은행 때문에 한국 비즈니스를 못하겠다고 푸념하는 것도 그래서다. 그러나 리먼브러더스라는 이름을 가진 미국 4위의 IB를 주당 50%가 넘는 할증 조건에서 60억달러의 거금을 주고 인수한다는 풍문은 한마디로 당혹스럽다.

한국 금융이 세계적 플레이어로 도약할 수 있는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라는 주장도 이미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천재일우라는 말은 '천 년에 한 번 있을까말까한 기회'라는 뜻이다. 이런 한껏 부풀린 단어를 써야만 하는지 궁금하다. 금융위기설이 파다한 이 시국에 전광우 금융위원장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도 알기 어렵다. 몸에 익은 조용한 처신까지 나무랄 수는 없지만 산업은행의 리먼 인수를 에둘러 표현하는 위원장의 어법은 지나치게 중의적이다. M&A의 기본 절차인 듀 딜리전스(due diligence)가 부실하다는 것만 해도 그렇다. 듀 딜리전스는 우리말로 실사(實査)다. 미국의 내로라하는 평가사들도 서브프라임 부실이 어느 정도에 이를 것인지 파악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리먼으로부터 제안을 받았다는 것이 불과 두 달 전인데 두세 달 만에 "협상 마무리!"라는 풍문은 당치 않다. 민유성 행장이 최근까지 리먼에서 일했다는 것도 이 거래가 부적절한 이유다. 본인이 이미 조건부 포기선언을 했다지만 여전히 리먼의 스톡옵션을 갖고 있다면 이는 모양이 좋지는 않다. '금융은 사람 장사'라는 특수성 때문에 이런 구차한 문제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산은이 풀드 등 경영진을 교체할 수 없다면 무익한 투자요,혹여 해고에 성공한다면 그 순간 리먼은 빈껍데기로 되고 마는 모순이 기다리고 있다. 전문인력이 나가면 빈껍데기요 사람을 붙들기 위해서는 더많은 추가 투자와 스톡옵션을 약속해야 한다.

LG전자가 감격 속에 미국의 제니스를 인수한 것은 1996년이었다. LG전자의 전신인 금성사가 바로 제니스의 라디오 부문 하청업체 아니었던가 말이다. 그러나 감격은 잠시요 길고 긴 진흙 뻘밭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새로운 부실이 불거지고,밑 빠진 독에 물붓기 식으로 거듭된 추가 투자를 하고서야 겨우 흑자로 전환된 것이 엊그제다. 제니스는 그나마 기술력도 있고 특허도 있었다. 리먼의 자산이래봤자 지금으로서는 부실자산이 전부다. '명성'이라는 자산이 있다지만 'US 리먼'의 가치와 '코리언 리먼'의 가치는 월가에서 하늘과 땅이다. 더구나 월가의 인맥이 떠나고 나면 남는 것은 종이다. 그렇게 되면 60억달러는 함부로 써 댄 백지수표로 되고 만다. 물론 민 행장이 결코 그런 일처리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풍문 대로라면 리먼을 인수해서 월가의 빅리거로 부상한다는 기대는 월가에 대한 콤플렉스를 전문 용어로 포장한 그럴 듯한 가공의 논리일 뿐이다. 포템킨 빌리지에 새삼 페인트를 바르는 것이요 어리석은 농부가 밭 작물을 한뼘이나 뽑아놓고 내가 대단한 일을 해냈다며 땀을 훔치는 것과 같다.

산은의 리먼 인수가 끝나면 아마 그때 미 FRB(연방준비제도이사회) 등 감독당국이 투입돼, 정말 공교롭게도 수조원의 추가부실을 발견해내게 될 것이다. 이는 거의 모든 부실기업 매각의,그리고 대부분 국가의 고전적인 수법이다(외환위기 당시의 한국을 빼면).그렇게 되면 인수자금은 적어도 10조원대로 불어난다. 부실을 인수하는 데 50% 할증의 조건으로,추가부실에 대한 어떤 확증도 실사도 없이 감행하는 이런 M&A는 한마디로 스캔들이다. 물론 위험이 따르지 않는 투자는 없다. 그러나 주부들의 주식투자에서조차 묻지마 투자는 금물이다. 더구나 산업은행은 본질상 은행 아닌 국책 개발기구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