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저녁으로는 선선한 바람이 불지만 아직도 한낮 기온은 30도에 육박한다. 인산인해의 북새통을 피해 휴가를 떠나거나 좀 더 한가한 주말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오징어의 고장 강원도 동해로 발길을 옮겨보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단백질이 쇠고기의 세 배나 된다는 오징어.특히 9월 초는 오징어 향미가 가장 좋은 때다. 지중해 연안의 나라들을 제외하곤 서양인들에게 천시받는 오징어지만 동양인들에게는 최상의 음식 재료 중 하나다. 생물로,냉동으로 심지어 말려서까지 먹는다. 게다가 가격도 싸다.

오징어 하면 떠오르는 지역은 울릉도,속초 그리고 강릉을 들 수 있다. 한가한 휴가지를 찾는 사람에게는 강릉의 사천 항구를 권할 만하다. 빨간 등대가 인상적인 곳으로,경포대에서 북쪽으로 차로 10여 분 더 가면 된다. 조선시대의 천재 여류문인 허난설헌의 고향으로 알려진 사천항은 강원도에서 유일하게 요트장이 마련돼 있어 바다 위를 나는 갈매기들의 움직임과 더불어 외국에 와 있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내 항구를 드나드는 어선과 작은 트럭들의 분주함에 일상을 깨닫고,강릉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물회 전문 식당으로 발길을 옮긴다.

사천항 입구에 늘어서 있는 여러 식당 중 가장 손님이 많은 '장안 횟집'은 여름 피서객과 가을 여행객들에게는 익히 소문난 집이다. 커다란 간판에 물회,미역국 전문점이라고 적어 놓은 것이 이 식당의 자부심을 내보인다. 요즘 서울에서 유행하는 것처럼 식당 바깥에 앉아 식사를 해도 되지만 한낮의 햇볕이 뜨겁다면 냉방이 잘된 넓고 깨끗한 실내가 더 반가울 수도 있다. 일반식당과 별반 차이 없는 실내에 자리잡고 앉으면,투박한 듯 하지만 정겨운 강원도 사투리의 종업원들이 주문을 도와준다. 오징어,가자미,광어와 세꼬시 물회가 있으며,광어는 자연산과 양식 두 가지로 가격이 3000원 차이가 있다. 원래 사천항은 양미리,광어,문어와 오징어가 주로 들어오며 근래에는 가리비 양식이 성황이다.

오징어 물회(1만원)와 자연산 광어 물회(1만5000원)를 시켜 비교하며 먹어 보기로 했다. 커다란 그릇에 오징어와 광어를 얇게 채 썰어 담고 양념 국물을 부은 다음,야채와 김 가루를 뿌려 나온 각각의 물회.상 앞에 놓이니 입안 가득 침이 고이기 시작한다. 물회를 주문하면 따라나오는 것은 밥 한 공기와 소면 두 덩어리,그리고 너무 맛있어 물회보다 더 인기라는 우럭 미역국이 제공된다. 밥이나 소면은 어느 정도 물회를 먹고 나서 비벼 먹거나 초반부터 함께 넣어 먹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소면은 물회에,밥은 미역국에 말아 먹었다. 오징어와 광어가 많아 야채가 부족하다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푸짐하다. 쫀득거리는 오징어를 국수처럼 젓가락으로 들어 훌훌 넣는 묘미는 입 안에서 착착 감기고 광어는 고소하면서도 부드러워 두 가지의 다른 맛을 만끽할 수 있다. 딸려 나오는 김치,열무 김치 모두 맛나고 생선포로 만든 식혜 또한 젓가락을 쉴새 없이 움직이게 한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기대 이상의 수확은 우럭 미역국이었다. 진하면서 개운하고,담백하면서도 구수한 '절묘한 조화'의 맛이 배어 있다. 해안가 사람들은 조개나 생선을 넣어 미역국을 잘 끓이는데,제주도에서는 옥돔이나 갈치,경상도를 비롯한 동해에서는 광어와 우럭을 종종 넣는다고 한다. 기름기가 있어 회든 탕이든 고소한 우럭 미역국은 전혀 비리지 않고 싱싱함 그 자체를 보여준다.

늦 여름에서 초 가을에 제철 음식을 맛보면서 곁들이는 와인은 칠레산 '칼리나 레제르바 (Calina Reserva)'로 세계 최고 인기 포도 품종인 샤르도네만으로 만들어진 화이트 와인이다. 상급의 품질로 평판받는 미국의 켄달 잭슨(Kendal Jackson)이 칠레에서 생산하는 것으로,오크통에서 숙성해 스페인어로 레제르바를 붙인다. 그 때문인지 알코올 도수도 화이트 와인치고는 꽤 높은 편이고 버터가 혀에 닿는 느낌처럼 부드러우면서 묵직하다. 그렇지만 잘 익은 사과의 향과 신선한 산도가 함께 묻어 나와 양념이 다소 강한 물회와 좋은 궁합을 이룬다. 시원하게 해서 즐기기에는 가격 대비 만족도가 높은 와인이다.

사천항 근처에는 물론 경포대 해수욕장이 있지만 그보다 작고 한가로운 여러 해수욕장이 있다. 피서철을 막 지나서인지 인파도 적고 조용하게 지낼 수 있는데,사천 해수욕장은 모래도 고운 편이고 경사가 완만해 얕은 바다 속에서 조개를 주울 수 있고 아이들과 함께 놀기에도 좋다. 발과 다리를 파도에 부딪치며 바닷가를 따라 걸으며 늦여름 낭만을 느껴보자.

/음식문화 컨설턴트 toptable22@naver.com 사진=김진화 푸드 포토그래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