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이후 고공비행을 지속하던 국제유가와 원자재 가격이 이제는 가파르게 하락하고 있다.

두바이유 현물가격은 이미 정부의 하반기 전망치인 120달러 밑으로 내려왔고, 대두.밀가루 등 주요 곡물은 물론, 금.구리.알루미늄 등 비철금속도 수요 감소 전망으로 약세를 보이고 있다.

석유 및 원자재 의존도가 높은 우리 경제에 이런 유가 및 원자재 가격 하락 소식이 전해지면서 침체를 이어가고 있는 경기에 회복세를 불어넣어줄 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정부 당국과 전문가들은 그러나 유가 및 원자재의 절대가격 수준 자체가 여전히 높은데다 세계 경기 둔화 위험이 부각되고 있어 아직 상황을 낙관하기는 이르다는 조심스런 평가를 내놓고 있다.

◇ 원자재가 하락세..추세전환 판단은 일러

원유와 비철금속, 농산물 등 국제 원자재 가격이 세계 경기둔화에 따른 수요감소 전망으로 일제히 하락세를 이어가고 있다.

여기에 달러화 약세가 둔화되면서 투기자금들이 상품시장에서 빠져나오자 내림폭이 가팔라지고 있다.

우리나라가 주로 수입하는 중동산 원유의 기준가격인 두바이유 현물가격은 5일 배럴당 117.32달러를 기록해 5월 8일(116.48달러) 이후 3개월 만에 최저치로 떨어졌다.

두바이유는 지난달 15일 배럴당 140.22달러를 정점으로 내림세를 타면서 20일 만에 배럴당 23.38달러(16.7%) 급락했다.

국제유가의 지표 종목격인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 선물가격도 5일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119.17달러에 거래를 마쳐 5월6일 이후 처음으로 종가 기준으로 120달러 아래로 떨어졌다.

금과 구리, 알루미늄, 니켈 등 비철금속도 수요감소 전망에 따라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5일 NYMEX에서 12월 인도분 금 가격은 전날보다 2.4% 하락한 온스당 886.10달러에 거래돼 900달러 밑으로 떨어졌고 런던금속거래소(LME)에서 전기동 선물은 t당 7천621달러를 기록해 지난달에 비해 880달러(10.35%) 하락했다.

곡물의 경우 시카고상품거래소(CBOT)에서 거래된 대두 선물가격은 부셸당 1천269달러로 지난달에 비해 389달러(23.46%) 급락했다.

이에 따라 원유 등 19개 상품으로 구성된 로이터/제프리스 CRB 지수는 4일 3.4% 하락한 401.98을 기록해 5월 2일 이후 3개월 만에 최저치를 기록한 데 이어 5일도 398.41로 하락세를 이어갔다.

그러나 원자재 가격이 당분간 하향조정 국면을 거치겠지만 본격적인 하락추세로 돌아선 것으로 판단하기는 이르다는 지적도 있다.

국제금융센터 오정석 부장은 "원자재 가격 상승을 이끌었던 수급 불균형이 완화됐지만 완전히 해소됐다고 보기 어렵다"며 "당분가 하향조정 국면이 이어질 것으로 전망되지만 본격적인 하락추세로 돌아섰다고 판단하기에는 시기상조"라고 말했다.

한국무역협회도 "수요 둔화와 지정학적 불안요인, 허리케인, 달러화 가치 변화 등이 유가의 주요 변수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며 "구리와 알루미늄은 비수기로 인한 단기적 공급과잉으로 가격조정을 겪었지만 앞으로 수급상황이 타이트할 것으로 예상돼 가격 상승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 우리경제 '가뭄에 단비'

그동안 우리 경제를 옥죄던 국제유가 및 원자재 가격의 하락으로 정부의 거시경제운용에도 다소간 숨통이 트일 것으로 전망된다.

유가 급등은 경상수지 악화 등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교역조건을 악화시켜 수입물가 상승을 불러오고 이는 다시 국내 소비자물가 상승 → 소비 및 투자 위축 → 생산 둔화 등으로 이어지면서 성장률을 낮추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정부 분석에 따르면 국제석유제품 가격 상승은 1개월 정도 시차를 두고 국내 석유류 가격에 반영되며, 국제유가가 10% 오르면 우리 경제의 성장률은 0.2%포인트 하락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에는 유가 뿐 아니라 원자재 가격까지 하락하고 있어 물가관리에 시달려온 정부 당국은 한층 반기고 있다.

기획재정부 고위관계자는 "원자재 가격 하락 소식을 기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다"며 "다만 원자재 가격 하락의 배경에 선진국의 경기 둔화 우려 등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수출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우리 입장에서 경계할 점도 많다"고 말했다.

유가 하락은 무엇보다도 외환위기 이후 가장 높은 상승률을 보이고 있는 소비자물가의 안정요인으로 작용하면서 서민경제 회복에 다소나마 도움이 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실제 정유사들의 석유제품 세전 판매가격의 경우 7월 셋째 주에 휘발유가 ℓ당 986.64원, 경유는 1천180.97원이었으나 넷째 주에는 각각 921.06원과 1천116.15원 등으로 65원 안팎이 떨어지면서 이미 국제유가 하락 추세를 반영하고 있다.

김동수 재정부 제1차관도 6일 열린 물가 및 민생안정을 위한 차관회의에서 "원유 등 원자재 가격이 최근에 의미있는 수준의 하락세를 보여 소비자들의 대차대조표에도 일부 개선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고 말해 최근 유가 및 원자재 가격 하락으로 물가 상승 분위기가 어느 정도 진정됐음을 시사했다.

정부 관계자는 "유가의 경우 아직 하락세라고 단언하기 어려우므로 홀짝제 등 에너지 절약 대책을 해제하기에는 이르다고 보고 있다"며 "정부는 원자재 가격 하락이 실제 소비자들이 체감하는 물가 인하로 최대한 빠른 시일내에 연결하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 전문가들 "긴장의 끈 늦추면 안돼"
전문 연구기관들도 유가 등 최근 원자재 가격 하락 소식을 기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다.

다만 유가가 여전히 높은 수준이고 세계 경기 둔화 위험이 부각된 만큼 상황을 낙관하기 이르다는 평가다.

KDI 조동철 거시금융연구부장은 "유가 하락이 좋은 소식이라는 데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배럴당 120달러 역시 한국 경제에는 여전히 부담스러운 수준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조 부장은 "현 상황에서 외환시장 기능을 정상화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며 "원.달러 환율 상승 국면이 진정됐다면 금리도 굳이 올릴 필요가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삼성경제연구소 권순우 거시경제실장은 "기본적으로 유가 상승 국면이 일단락 된 것으로 보고 있다"며 "다만 유가가 이처럼 급락하는 것은 세계 경기 둔화에 대한 우려가 그만큼 커지고 있다는 방증인 만큼 긴장의 끈을 늦춰선 안 된다"고 말했다.

권 실장은 "수출 의존도가 매우 높아진 상황에서 세계 경기 둔화는 한국 경제의 주 엔진에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점을 잘 살펴야 한다"고 조언했다.

현대경제연구원 유병규 경제연구본부장은 "현재 유가가 싸다고 느끼는 것은 초고유가 시대를 겪고 난 후의 착시 현상에 불과하다"며 "지금도 유가가 높은 만큼 분위기가 이완되면 안 된다"고 말했다.

유 본부장은 "정책 당국자들도 기존 위기 관리계획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에너지 효율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서울연합뉴스) 김준억 박대한 박용주 기자 justdust@yna.co.krpdhis959@yna.co.krspeed@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