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뉴욕 증시는 버지니아주 알링턴에서 날아온 낭보에 모처럼 반등했다. 표면적으론 연방예금보험공사(FDIC) 포럼에서 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 "투자은행에 대한 긴급대출을 내년까지 연장하겠다"고 발언한 게 주가를 밀어올린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시장참가자들은 '다이몬 효과'가 더 컸다고 입을 모았다. 포럼에서 "시장의 긴장감이 다소 완화될 것"이라는 제임스 다이몬 JP모건체이스 최고경영자(CEO)의 발언에 투자자들이 안도했다는 전언이다.

월가에서 다이몬의 영향력은 이처럼 막강하다. 지난 3월 베어스턴스를 인수키로 결정한 이후 그는 '난세의 영웅'이 됐다. 그렇지만 양지가 있으면 음지도 있는 법.다이몬이 난세의 영웅으로 떠오를 때 난다긴다 하는 월가 CEO 중 상당수는 짐을 쌌다. 씨티그룹의 찰스 프린스와 메릴린치의 스탠 오닐이 하루 아침에 자리를 잃었다. 15년간 권좌를 지켜온 베어스턴스의 제임스 케인 회장도 쫓겨났다. 미국 4위의 상업은행인 와코비아와 보험사인 AIG,워싱턴 뮤추얼의 CEO도 물러났다. 위기에 빠진 국책 모기지회사인 패니매와 프레디맥의 CEO 거취도 바람 앞의 촛불 신세다.

신용위기는 월가 금융회사 CEO의 신임 조건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줬다. 다름아닌 경영 실적이다. 실적이 좋으면 천문학적인 보수를 줘가면서도 CEO를 신임한다. 반대로 실적이 나쁘면 가치없이 내치는 게 월가의 생리다.

FDIC포럼이 열리던 8일 와코비아은행은 로버트 스틸 재무부 차관을 신임 CEO로 선임했다. 현직 재무부 차관인 만큼 뒷말이 있을 법도 했다. 그러나 '아니올씨다'다. 골드만삭스에서 잔뼈가 굵은 그의 이력을 볼 때 기대해도 좋다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메릴린치가 골드만삭스 출신의 존 테인을 영입했을 때도 직원들은 환영했다. 이렇게 보면 월가 금융회사의 CEO 선임조건은 명확해진다. 다름아닌 출신과 연줄에 관계없이 실적을 낼 만한 인물을 뽑는다는 사실이다.

월가 CEO의 선임과 신임 과정은 한국과 너무나 대조적이다. 정권이 바뀌었다고 금융 공기업 CEO를 싸그리 물갈이하는 게 우리 현실이다. 정부가 대주주인 만큼 실적에 관계없이 금융 공기업의 CEO를 갈아치울 수는 있다고 치자.그렇지만 후속 인사 과정에서 나오는 뒷말은 영 개운치가 않다. 능력여부를 떠나서 '소문'대로 CEO 인사가 착착 이뤄지고 있는 정황이 적지 않은 것이다. 국책은행 일부 감사조차 선임 사유가 모호한 사람이 임명돼 노조의 반발을 사고 있다는 말도 들린다.

'월가의 족집게 이코노미스트'로 평가되는 손성원 캘리포니아 주립대 교수(전 LA한미은행장)는 얼마 전 한국의 금융 공기업 CEO에 공모했다가 탈락했다. "다른 자리에도 응모할 것인가"라고 묻자 "내가 순진했었다"며 웃었다. 정말 '공모'인줄 알았으나 실상은 달랐다는 뜻이다.

조금 비약한다면 주주총회 당일 정부에서 날아든 쪽지 하나로 임원이 뒤바뀌었던 외환위기 이전으로 되돌아가지 말란 법도 없을 것 같다. 금융 강국은 구호로만 되는 게 아니다.

뉴욕=하영춘 특파원 ha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