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효종 < 서울대 교수·정치학 >

법정에 선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이 기어코 눈물을 보였다. 삼성전자를 성장시킨 과정을 설명하는 자리에서다. 이 회장이 아들과 함께 법정에 선 모습에서 착잡함이 느껴지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한마디로 한국 기업인의 업보인지,아니면 운명인지,도무지 짐작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런 생각이 그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했을법하다. 그의 복잡한 흉중을 헤아릴 수는 없겠지만,어찌 회한이 없겠는가.

한국의 기업인들은 척박한 풍토에서 '우리도 잘할 수 있다'는 의지 하나로 세계속에 우뚝 선 사람들이다. 삼성만 해도 설탕과 밀가루를 수입해 국내시장에 팔던 기업에서 세계적인 초우량 기업으로 성장했으니,기적이 따로 없다.

그러고 보면 한국 기업인들의 성장 동력도 특이하다. 일찍이 막스 베버는 서구에서 기업가정신은 프로테스턴티즘의 검약성 속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했다. 신의 소명에 따라 열심히 일을 하고,검소한 생활을 하며 자본을 모은 것이 서구자본주의 발전의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기업가정신은 그런 프로테스턴티즘이 아니라 전형적인 민족주의 정신에서 싹텄다. "일본 기업이 저렇게 잘 나가는데,왜 우리라고 못할쏘냐"하는,그 당당한 뚝심과 민족주의가 한국 기업가정신의 동력이 되고,기폭제가 된 것이다. 이처럼 민족주의로 무장한 기업인들 덕분에 우리사회가 번영을 이루었는데,대기업을 운영하는 것이 교도소 담장 위를 걷는 것처럼 아슬아슬해서야 되겠는가.

물론 기업인들도 잘못했으면 벌을 받아야 한다. 또 법을 어겼으면 거기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바로 그것이 법치국가에서 당연한 일이고 또 죄값의 의미일 터이다. 그럼에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기업가는 징벌의 대상이 되지만,기업가정신은 징벌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기업가는 감옥에 수감할 수 있으나,기업가 정신은 교도소 독방에 가두어서는 안된다. 기업가 정신은 감옥에 넣을 것이 아니라,대명천지(大明天地) 빛을 보게 해 국내시장이나 국제시장을 막론하고 펄펄 살아나게 해야한다. 삼성전자 제품 11개가 세계 일류에 오르는 그 어려운 일을 해낸 것이 바로 기업가정신이 아니던가.

문제는 물을 산소와 수소로 분리하듯 '기업인'과 '기업가정신'을 딱 부러지게 분리하기가 어렵다는 데 있다. 과연 기업인이 아닌 공무원이나 관료가 기업가정신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종교인이 기업가정신을 발휘할 것인가. 그런가 하면 일반 사원이 기업가정신에 투철해 흠뻑 젖어있을 것인가.

기업가정신에는 양면성이 있다. 그 본질은 일찍이 슘페터가 표현한 '창조와 파괴'란 말에 숨어있다. 기업인들은 창조하면서도 동시에 파괴하는 존재다. 혁신을 하기도 하지만,과도한 모험을 하거나,법이나 원칙들을 쉽게 생각하는 습관에 젖은 존재가 기업인이다. 기업가들은 신중함을 조언하는 사람들에게 "이봐,해 봤어?"라고 반문할 정도로 직관주의,불확실성에 대한 모험심,또한 자신 기업의 미래상에 대한 남다른 애착과 신념을 갖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규제와 구속을 싫어하는 기업가들은 통념적 의미에서의 범법자나 범죄자와는 달리 모험과 창의가 넘쳐 흘러 합법과 비합법의 경계를 거리낌없이 넘나드는 사람들이다. 곤혹을 치르고 있는 이 회장도 바로 이러한 타입이 아니었을까.

사법부는 이 회장의 범법성 유무와 관련,'정의의 여신'처럼 저울질을 하고 있다. 그 저울질 가운데 하나라면,배임과 조세포탈이 유죄인가 하는 문제 못지않게 삼성의 기업가정신을 되살리는 길이 무엇일까 하는 점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