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대박의 행운엔 비법이나 공식이 없다. 마른하늘에 벼락 맞듯, 눈감 짝할 새 없이 번쩍하고 터진다. 세상에 우연이란 없지만, 범부들로선 그 인과를 금세 알아차릴 수가 없다. 유감스럽게도 행운은 조절할 수 없다. 하지만 대박 이후에 관리는 자기 할 나름이다.

보통 큰 행운을 거머쥔 사람들의 뒤끝은 별로 좋지 않다. 행운에 들떠 다음 투자도, 다음 복권도, 다음 사업도 지금보다 더 큰 성공을 부르겠지 하는 조급함이 앞서기 일쑤다. 바램과 달리 큰 코를 다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마치 무서운 사채 빚을 자기 복인 양 착각하는 것과 비슷하다.

‘극상(極上)이면 자멸(自滅)’이라는 말이 있다. 꽃이 지는 까닭이 무엇일까. 간밤의 굵은 장대비도, 심술궂은 바람도 무수한 꽃잎을 떨어뜨린 그 본질적 이유가 아니다. 이미 꽃이 활짝 피었기 때문이다. 정점을 지나 때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꽃과 열매는 동시에 얻을 수 없음이 자연의 이치가 아니겠는가.

인생사도 그러하다. 권세의 정점, 재력의 정점 다음엔 반드시 내리막이 있다. 그래서 그런 생리를 잘 아는 사람은 갑작스럽게 닥친 엄청난 행운에 오히려 ‘이 행운이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하며 불안해하기도 한다.

어떻게 하면 갑작스럽게 다가온 행운을 재앙으로 돌변하지 않게 하고 오래 잡을 수 있을까.

사실 이런 고민은 진시왕이 대륙을 통일하고 천자로 등극한 후에 ‘영원히 살 수 없을까’하는 고민과 비슷하다. 그러나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는 불로장생의 욕망과는 달리 행운은 행복과 복으로 만들 기회가 있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다. 흔히 토끼풀이라 불리는 클로버에 그 지혜가 숨어있다.

클로버의 꽃말은 보통 ‘행운’으로 알려져 있다. 나폴레옹이 네 잎 클로버를 발견하고 허리를 숙이는 순간 총알이 스쳐지나갔다는 일화에서 유래되었다. 클로버는 이파리 수가 세 개다. 가끔 돌연변이로 네 잎이 있다. 나폴레옹은 바로 이 네 잎이 클로버가 신기해서 눈길을 준 것이다.

하지만 클로버의 본래 꽃말은 ‘행운’이 아니라 ‘행복’이다. 정상정인 세 잎의 클로버는 ‘행복’이고 비정상적인 네 잎의 클로버가 ‘행운’이란 사실. 여기서 행복과 행운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행복이야말로 흔하고 평범한 일상이며, 행운은 정도를 벗어난 상태란 뜻.

행운은 바로 비정상적인 상태를 말한다. 행운을 거머쥔 사람은 적금이 탄 게 아니라 대개가 고리의 대출 또는 사채를 얻은 것이나 다름없다.

행운을 행복으로 바꾸는 연금술 비법은 간단하다. 행운의 네 잎을 하나 버리면 된다. 하나 덜어내는 순간 행복의 세 잎 클로버가 된다. 행운은 움켜쥐고 욕심을 더 내는 순간 불행이 되고, 기꺼이 나누는 순간 행복이 된다. 행운은 남의 몫까지 받은 것이기에 주위에 아낌없이 베풀어야 후한을 면할 수 있다. 먼저주고, 빈곳에 주고, 항상 주는 삶이야말로 행복의 지름길이다.

하지만 단지 ‘주는 것’만으론 부족하다. ‘준 것조차 잊어야’한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행운이 비정상적이라는 사실, 행운 다음엔 내리막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겸손한 마음가짐을 갖는 그 순간 행운은 바로 자기 복이 되는 될 수 있다.

사람의 복 그릇은 전생(前生)에서부터 연유한 마음가짐이다. 그래서 현실의 사람들은 저마다 차이가 있고 세상은 불평등하다. 현재 마음의 그릇을 넓힘으로서 현재와 미래에 ‘타고난 복’을 쌓을 수 있다.

행운은 불시에 찾아오지만 행복과 복 밭으로 일구는 일은 순전히 자신의 몫이다. 오늘 뒷동산에라도 올라, 네 잎의 행운과 세 잎의 행복의 지혜를 들려줄 클로버를 찾아보는 여유는 어떨까. (hoo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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