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재 <시인ㆍ경희사이버대 교수 >

첫 문장에 목숨을 걸어라.

글쓰기 강의 첫 시간에 학생들에게 당부하는 말이다.글쓰기에 왕도는 없다.그렇다고 절망적인 것은 아니다.글쓰기 강의는 '글쓰기 클리닉'이다.

자신의 글에서 자주 반복되는 '나쁜 버릇'부터 찾아내 근절하는 것이 첫 번째 진료다.

그런 다음,첫 문장과 도입부에 정성을 들이면서 가능하면 문장을 짧게 운영할 것.이것이 내가 학생들에게 제시하는 '1차 처방전'이다.

며칠 전,문학평론을 하는 후배가 꼭 한번 읽어보라며 소설책 한 권을 건넸다.그런데 "도입부가 좀 지루하긴 한데요…"라고 덧붙이는 것이었다.후배는 내가 첫 문장 신봉자임을 잘 알고 있었다.표지를 보니 대단했다.지난 해 퓰리처상 수상작이었고,아마존과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였다.코맥 매카시 장편소설 '로드'.도입부가 지루한데도 독자들이 그렇게 찾는다고? 첫 문장은 신의 선물이라고 믿어왔던 나 같은 독자를 시험하는 소설 같았다.

게다가 나한테는 낯선 작가였다.프로필부터 살폈다.1933년 미국 로드아일랜드 주 출생.65년 데뷔했지만,80년대 중반 '피의 자오선'으로 뒤늦게 문학적 명성을 얻었다.얼마 전 국내에 개봉됐던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원작자이기도 했다.다른 자료를 검색했더니 '로드'는 작가가 70대에 접어들며 썼다고 한다.문명(文名)을 얻기 전까지 매카시는 지독하게 가난했다.치약 살 돈이 없을 때도 있었다.그런 가난 속에서도 그 어떤 것과도 타협하지 않았다.직업도 갖지 않았다.가난 속에서 은둔하며,오직 소설쓰기에만 매달렸다.

매카시의 삶과 작가 정신은 '지루한 도입부'에 대한 나의 염려를 흔들기에 충분했다.표지를 열었다."남자는 깜깜한 숲에서 잠을 깼다"가 첫 문장이었다.소설 속의 남자는 꿈에서 깨어났지만,독자인 나는 '깜깜한 숲'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하지만 곧 '길'을 찾았다.짧고 속도감 있는 문장과 선문답 같은 대화가 이내 서사의 길을 열어젖혔다.나는 곧 남자와 소년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소설은 한마디로 미래에서 보내온 묵시록이었다.

마지막 인류로 보이는 아버지와 어린 아들.문명은 오직 잿빛 흔적으로만 남아 있다. 통조림을 제외하면 살아 있는 먹이(생명)는 인간뿐이다.두 부자는 다른 인간의 먹이가 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인간으로부터 도망친다.추위와 굶주림과 싸우며 길을 열어가는 두 부자의 목적지는 따뜻한 남쪽.방수포와 담요,물,통조림을 실은 카트,그리고 라이터와 총이 그들이 가진 것의 전부다.신(神)조차 얼씬거리지 않는 인류의 마지막 풍경은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노인이 주고받는 대화를 통해 미래를 예비한다.

부처를 연상시키는 노인은 "사람들은 늘 내일을 준비했지.하지만 (…) 내일은 그런 사람들을 위해 아무 준비도 하지 않았어"라고 말한다.노인이 "신은 없고 우리는 신의 예언자들이오"라고 말할 때,남자의 어린 아들에게서 미래가 다시 태어난다.아버지는 죽고 아들은 새로운 창세기의 입구에 선다….그러니까 '로드'는 인류의 마지막 아버지와 새로운 인류의 첫 아버지 사이의 대화록이다.최후의 아버지는 산업문명,아니 전적으로 화석 에너지에 의존해온 '석유문명'의 초상,즉 현재의 우리들이었다.'로드'는 이렇게 말하려는 것 같았다.보아라,지구를 과도하게 착취하는 석유문명의 최후는,인간이 인간을 잡아먹는 지옥이다.하루빨리 석유문명을 버리고 '다른 길'을 찾아라,그리고 절대 포기하지 마라!

첫 문장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매카시처럼 상상력이 뛰어나다면,그리하여 인간과 문명을 성찰하고 미래를 다시 설계하도록 하는 힘 있는 이야기라면,도입부는 큰 문제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