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규 사학연금관리공단 자금운용관리단장(52)의 수첩 뒷장에는 일정표 몇 장이 붙어 있다.

국내와 해외에서 열리는 주요 마라톤 대회 스케줄이다.

잡지에서 오려내 붙인 것도 있고 손으로 직접 써놓은 것도 있다.

'뉴욕마라톤 홍콩마라톤 런던마라톤 금강산마라톤….' 가끔씩 꺼내보며 멋진 코스를 달리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지만 '입맛만 다시고' 이내 수첩을 접기 일쑤다.

"전부 달려보고 싶지만 시간 내기도 힘들고 비용도 만만치 않아서요.그래도 몇몇 대회는 꼭 나가보고 싶습니다."

이 단장은 여의도 증권가의 소문난 마라톤 마니아다.

업무를 마치면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매일 헬스장에서 10㎞씩 어김없이 뛴다.

시속 12㎞로 달리면 딱 50분 걸린다.

2002년부터 10여회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했고 2006년에는 '마라토너의 로망' 보스턴마라톤에도 참가했다.

"1주일 휴가내고 다녀왔죠.보스턴 남쪽 외곽에서 중심가를 향해 난 옛 길을 따라 3만명이 뛰는 장면은 정말 감동적이었어요. 마라톤이 열리는 날은 임시 공휴일이에요. 보스턴 시내의 모든 스쿨버스들이 동원돼 참가자들을 집합장소인 커먼파크에서 출발선까지 실어 나르는 장면도 장관이죠."

보스턴에서 그의 기록은 3시간 24분이었다.

최고 기록은 2005년 봄 동아마라톤에서 거둔 3시간 17분이다.

달리기를 하기 전 그의 취미는 등산이었다.

이 단장은 1982년 한국투자신탁(현 한국투자증권)에 입사해 애널리스트와 펀드매니저 자산운용본부장 IB사업본부장 등을 거쳤다.

"매니저 시절이던 1990년대엔 한창 산에 빠져 있었죠.특히 야간 산행을 즐겼어요.일주일에 한두 번씩은 저녁에 과천 집에서 나와 청계산이나 관악산을 등반했습니다.밤 공기도 시원하고 특히 정상에서 바라보는 야경이 기가 막혔죠."

그는 산을 좋아하는 동료들과 매년 '5산 종주'에 나서기도 했다.

'불암산∼수락산∼사패산∼도봉산∼북한산'을 16시간 만에 주파하는 코스다.

금요일 저녁 10시 무렵에 출발해서 토요일 오후 2시에 내려오는 강행군이다.

하지만 등산만으로는 뭔가 아쉬움이 남았다.

"등산은 일주일에 한두 번밖에 즐길 수 없어서 산을 내려오면 늘 부족한 느낌이 들었어요.매일 어디서나 할 수 있는 게 뭘까 생각하다 고른 게 마라톤이었습니다."

당시 몸무게가 80㎏이었던 그에게 달리기는 쉽지 않은 운동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빠르게 걸으며 몸을 가볍게 하는 데 주력했단다.

꾸준히 걷다보니 70㎏까지 감량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속도를 붙여가며 본격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2002년 봄에 처음 하프마라톤에 나갔는데 1시간 40분 만에 주파했어요.

생각보다 기록이 잘 나왔죠.자신감이 붙어서 곧바로 그 해 가을에 열리는 춘천마라톤에 신청서를 미리 내고 풀코스 준비에 들어갔죠." 그는 인터넷을 뒤져 풀코스에 필요한 연습법을 찾아 부지런히 따라했다.

구간을 나눠서 빠르게 뛰기와 천천히 뛰기를 반복하는 '인터벌 훈련'과 천천히 장거리를 달리는 'LSD(Long Slow Distance)' 훈련을 12주 동안 소화했다.

첫 도전한 풀코스에서 3시간 50분이란 좋은 기록을 냈다.

자금운용도 마라톤과 비슷하단다.

그가 관리하는 자금만 10조원에 이른다.

이 단장은 "마라톤은 인내심을 가지고 꾸준히 연습한 만큼 결과가 나온다"며 "조급하게 대박을 노릴 것이 아니라 철저한 분석과 연구로 목표수익을 달성하는 자금운용은 마라톤과 닮은 점이 많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후배 펀드매니저들에게도 마라톤과 같은 운동을 열심히 할 것을 권하고 있다.

운동을 하면 자신감이 생기고 사고방식도 긍정적으로 바뀌는 것을 몸소 체험했기 때문이다.

이 단장은 마라톤에 입문하는 초보자들에게 몇 가지 당부했다.

절대 욕심내지 말고 걷기부터 시작해서 체중을 서서히 줄이되 본격적으로 달리기 연습에 들어가면 근력운동도 병행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특히 피로할 때는 절대 무리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전날 술을 많이 마시고 술독을 뺀다면서 땀을 뻘뻘 흘리며 달리는 사람들을 가끔 보는데 정말 위험한 일입니다. 심장에 무리가 갈 수 있거든요.운동도 컨디션이 좋을 때 해야 효과가 있습니다."

그는 작년 12월 한강 주변 100㎞를 쉬지 않고 달리는 울트라마라톤을 12시간에 주파했다.

"겨울 바람을 맞으며 하루 종일 뛰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지 완주하고 나서는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어요.그런데 솔직히 말씀드리면 올 겨울에 또 뛸지도 모르겠어요.허허."

글=박해영 기자 bono@hankyung.com

사진=허문찬 기자 swe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