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중국'과 '국가통일'을 표방하며 상대 정부를 인정하지 않던 중국과 대만이 1992년 10월 홍콩에서 만났다.

협상주체는 중국의 해협양안관계협회와 대만의 해협교류기금회였다.

이 협상에서 '92 공식'이 합의됐는데,그 핵심은 '하나의 중국'을 인정하되 중국과 대만이 각자의 명칭을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오랜 단절을 깨고 양안의 국민들에게 희망이 전달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대만독립을 부르짖는 리덩후이(李登輝) 전 총통이 양국론을 주장하면서 두 나라 관계는 냉각되기 시작했다.

천수이볜(陳水扁) 총통의 민진당 정부가 들어서면서는 더욱 악화됐다.

설상가상으로 양안접촉의 대표자였던 대만의 구전푸와 중국의 왕다오한이 차례로 숨지면서 물밑 대화마저도 끊겨버렸다.

좀체 풀릴 것 같지 않았던 양국관계는 지난 3월 대만 총통선거에서 마잉주(馬英九)가 승리하면서 해빙무드로 접어들었다.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공약으로 내걸었기에,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양국관계의 진전은 예상을 뒤엎었다.

지난 주말,중국과 대만이 베이징에서 직항로를 개설하고 대표부를 설치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1949년 대만에 국민당 정권이 들어선 이후 실로 59년 만에 신삼통(新三通ㆍ직항ㆍ관광ㆍ환전)시대가 열리면서,경제공동체 실현을 위한 첫발을 내디딘 셈이다.

차이나(China)와 타이완(Taiwan)을 합성한 '차이완'시대의 개막이라는 호들갑이 별로 어색하지 않다.

그렇지만 양국이 풀어야 할 과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당장 대만의 토착세력들은 총통의 정책이 대만의 정체성을 훼손하고 대륙에 흡수ㆍ통합되는 길을 공식적으로 여는 처사라며 반발하고 있다.

중국 역시도 어느 선까지 개방을 할 것인가는 큰 걱정거리이다.

국민들이 누리는 자유와 경제력 차이가 대만과는 너무도 크기 때문이다.

어쨌든 양안의 관계개선은 교착상태에 빠진 우리 현실과 비교되면서 부럽기만 하다.

한반도에는 언제쯤 획기적인 전기가 마련될까 하는 착잡한 마음뿐이다.

박영배 논설위원 youngba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