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의 개정 헌법인 '리스본 조약'이 아일랜드 국민투표에서 부결됐다.

이에 따라 궁극적으로 'EU 합중국'으로 가기 위한 정치 통합 계획이 또다시 좌절되면서 EU가 혼란에 휩싸였다.

아일랜드 정부는 13일 리스본 조약의 찬반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 개표 결과 반대 53.4%, 찬성 46.6%로 부결됐다고 선언했다고 현지 외신들이 보도했다.

리스본 조약은 2005년 프랑스와 네덜란드 국민투표에서 부결된 최초의 EU 헌법을 대체하기 위해 만든 개정 조약으로 '미니 EU 헌법'으로 불린다.

대외 관계에서 EU를 대표할 유럽이사회 의장을 정하고 외무장관직을 신설하는 내용을 담았다.

국제무대에서 EU를 '하나의 유럽'이란 거대한 정치 세력으로 부상시키기 위한 장치인 셈이다.

이 조약은 회원국 모두가 찬성해야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

27개 EU 회원국 중 26개국은 비준 부담을 덜기 위해 의회 비준을 선택했으나 아일랜드만 찬반 여부를 국민투표에 부쳤다.

독일 프랑스 그리스 등 18개 회원국은 이미 조약을 비준했다.

이날 조약 부결에는 51%의 저조한 투표율이 작용했다.

강한 신념을 가진 반대파들이 상대적으로 적극적인 투표 참가 의지를 보였다는 분석이다.

반대파들은 리스본 조약이 소국인 아일랜드의 군사적 중립성과 유럽 내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데다 EU 세제 단일화로 국내 세제가 타격을 받고 낙태 매춘 등 사회문제를 일으킬 것이라며 반발했다.

무엇보다 바닥으로 떨어진 경제가 부결의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힌다.

아일랜드 경제는 최근 실업률이 급증하고 유가와 식품 가격이 치솟으며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이 같은 경제 상황에 대한 불만이 국민들의 '반대표'로 표출됐다는 분석이다.

하지만 EU 전체 인구의 1%도 안 되는 300만명의 아일랜드 유권자가 EU의 정치 통합을 가로막았다는 비난을 피하기는 어려워졌다.

아일랜드는 2001년에도 리스본 조약의 전 단계인 니스 조약을 국민투표를 통해 부결시킨 전력이 있다.

리스본 조약이 아일랜드 국민투표의 벽을 넘지 못함에 따라 당장 영국에서는 진행 중인 의회 비준 절차를 중단하고 국민투표를 실시하라는 여론의 압력이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조약 부분 수정 후 아일랜드에 재투표 요청 △비준 중단 뒤 조약 재수정 △26개국 비준으로 조약 우선 발효 △조약 폐기 등 4가지 시나리오를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어느 방안도 역풍이 거셀 전망이어서 EU 지도자들의 고민은 이래저래 깊어지고 있다.

장 피에르 주예 프랑스 EU담당 장관은 "아일랜드에서의 예기치 않은 결과에도 불구하고 다른 EU 회원국의 비준 절차가 중단돼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EU 정상들은 오는 19~20일 브뤼셀에서 회의를 열고 아일랜드 부결 사태의 사후 대책을 논의할 예정이다.

유병연 기자 yoob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