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제비 적정화 시행 1년6개월] 무차별 약값 인하에 업계 '한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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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2년여 전인 2006년 5월3일.유시민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은 기자간담회를 갖고 "앞으로 가격 대비 효과가 우수한 의약품만 선별해 건강보험 대상 약품으로 지정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른바 '약값 인하 폭탄'으로 불리는 '5ㆍ3 약제비 적정화 방안'이 발표되는 순간이었다.
대다수 국민은 정부의 방침을 환영했다.
일부 의사와 약사들에게 건네지던 제약사들의 '리베이트' 비용이 약가 인하를 통해 소비자의 몫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기대에서였다.
하지만 지난해 1월 제도가 시행된 뒤 1년6개월이 지난 지금,건강보험 재정은 파탄 직전의 위기에 몰렸고 제약사들은 "인하폭이 너무 커 견딜 수가 없다"며 반발하고 있다.
약값 인하만으로는 건보 재정 건전화란 목표 달성에 적잖은 한계가 드러났을 뿐 아니라 심각한 부작용도 생기고 있다는 얘기다.
◆늘어나는 건보 적자… 약가 인하 불가피
정부가 '약제비 적정화 방안'을 마련한 이유는 건강보험 곳간이 비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약값이 보험 재정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30% 가까이 늘어나는 상황을 방치해 둘 수 없다고 판단한 것.실제 2001년 4조1804억원이던 건강보험 약제비는 2007년 9조5126억원으로 6년 만에 2배 이상으로 급증했다.
총 진료비(32조2600억원)에서 약제비가 차지하는 비중도 29.6%까지 상승했다.
정부가 빼든 카드는 모든 의약품을 보험 대상으로 인정해주던 '네거티브 시스템'을 비용 대비 효과가 뛰어난 약품만 보험 대상으로 끌어안는 '포지티브 시스템'으로 바꾼 것.정부가 직접 약효와 가격을 점검해 '효능은 그저그런데 신약이란 이유만으로 높은 가격을 요구하는 약품'에 대해선 보험 적용 대상에서 제외키로 한 것이다.
민영보험제도를 도입한 미국과 달리 국가 단일 건강보험제도를 운영하는 우리나라에서 건강보험비급여 약을 복용하려면 환자가 그 비용을 전액 부담해야 하는 만큼 수요가 끊길 수 밖에 없다.
정부가 판단한 '쓸데없이 비싼 약'이 보험 적용을 받으려면 비슷한 약효를 지닌 저렴한 약만큼 가격을 낮춰야 한다.
정부는 신약은 물론 현재 건강보험 적용을 받고 있는 기존 약에 대해서도 2011년까지 순차적으로 가격을 떨어뜨리기로 하고,고지혈증 치료제를 시작으로 효능 및 약가 재평가 작업에 들어간 상태다.
정부는 복제약에 대해서도 메스를 댔다.
최초로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복제약 가격에 대해 과거에는 신약 가격의 80% 정도를 인정해줬지만,지난해부터는 이 비율을 68%로 떨어뜨렸다.
복제약이 주류를 이루는 국내 제약사 입장에선 엄청난 타격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보건복지가족부 관계자는 "제약사들이 매출의 20%가량을 리베이트로 제공한다는 건 그만큼 약값에 거품이 끼었다는 얘기"라며 "조만간 고혈압 치료제 등 대형 약품에 대한 약값 인하 작업이 시작되는 만큼 약제비 절감 효과는 본격적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다.
◆건보재정은 파탄…제약업계는 고사 위기
복지부는 약제비 적정화 방안을 마련한 가장 큰 이유로 '건보 재정 건전화'를 꼽았지만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적자를 줄이기에는 역부족인 형국이다.
실제 2005년 1조2500억원에 달했던 건보 재정 누적적립금은 2006년부터 당기수지가 적자로 돌아서면서 지난해 말 8951억원까지 줄었다.
올해도 1433억원의 당기적자가 예상돼 적립금은 그만큼 줄어들 전망이다.
급속한 인구 고령화로 인해 병원을 찾는 노령 환자 수가 늘어나고 있는 데다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 등 장기 치료가 필요한 만성질환자가 급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내년이다.
차상위계층(국민기초생활수급권자가 아닌 가구로서 소득인정액이 최저생계비의 120% 이하인 가구)에 대한 급여비 부담이 6600억원이나 늘어나는 데다 전체 급여비 지출 증가분까지 감안하면 건보 재정은 의약분업 여파로 재정이 파탄났던 2001년 이후 최악의 상황에 빠져들 가능성이 크다.
노령 환자층이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올 연말 7518억원으로 예상되는 누적적립금이 내년에 고갈될 가능성마저 배제할 수 없다.
정부의 전방위적인 약가 인하 정책에 대한 제약업계의 반발은 증폭되고 있다.
정부가 국민 건강보다는 약값 인하에만 매달리는 탓에 제약업계의 신약 개발 의지를 꺾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실제 약제비 적정화 방안이 시행된 1년6개월 동안 보험 약가를 인정받은 신약은 전체 신청 건수의 30%에도 못 미쳤다.
지난달 실시된 고지혈증 치료제 약가 재평가 과정에서는 효능이 뛰어난 신약이 오래 전에 나온 '옛날 약'보다 오히려 싸게 책정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제약업계 관계자는 "약값 인하 정책의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이로 인한 모든 부담을 제약업계가 홀로 뒤집어쓰는 것은 부당할 뿐 아니라 효과도 크지 않다"며 "건강보험 재정 건전화를 위해서라면 전체 비용의 70%를 차지하는 의료기관 및 약국에 대한 절감 방안도 병행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오상헌/류시훈 기자 oh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