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를 여성으로 진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패션 황제' 이브 생 로랑이 1일 오후 11시10분(현지시간) 파리에서 타계했다.

향년 71세.

생 로랑의 사망 소식을 공식 발표한 피에르 베르제 생 로랑재단 측은 "그가 2002년 은퇴 이래 지병을 앓아 왔다"고 전했으나 직접적인 사망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생 로랑은 평생 '여성'에 대한 열정을 디자인의 원천으로 삼아 단순하면서도 우아한 여성스러움을 패션으로 표현하는 데 일관했다.

그가 '순수 패션의 대부'로 칭송받는 이유다.

특히 사회 속에서 변화하는 여성상을 디자인에 반영,여성복은 물론 여성의 삶까지 바꿨다는 평가를 받는다.

처음으로 여성 정장에 바지를 도입한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아프리카의 수렵복을 일상복으로 재현한 사파리룩과 좁은 어깨에서 시작해 아래로 퍼지는 무릎 길이의 치맛단이 사다리꼴을 이루는 트라페즈룩,몬드리안의 추상화를 옮겨놓은 몬드리안룩 등을 고안해내 패션계에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그에게 최초라는 수식어는 또 있다.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살아있는 패션 디자이너로는 최초로 개인전을 열었으며 흑인 모델을 최초로 패션 무대에 세우기도 했다.

"엄밀한 의미에서 예술은 아니지만 예술가가 필요한 분야"라는 패션에 대한 그의 지론은 수많은 후배 디자이너들에게 금과옥조로 통한다.

1936년 8월1일 당시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에서 태어난 생 로랑은 17세 때인 1953년 디자인이 담긴 스케치북을 들고 파리로 이주했다.

그의 비범함을 알아본 패션잡지 '보그'의 미젤드 브뤼노프 편집장의 추천으로 크리스티앙 디오르 의상실에서 일하며 패션 디자이너로 날개를 펴기 시작했다.

1957년 디오르가 사망하자 약관 21세에 디오르의 후계자(수석 디자이너)로 지명됐다.

이후 자신의 천재성을 드러내며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1960년 알제리 전쟁으로 입대 영장을 받은 생 로랑은 디오르그룹의 수석 디자이너 자리를 넘기고 전장으로 향했다.

3주 만에 건강상의 문제로 파리로 돌아온 뒤 평생의 동반자가 된 피에르 베르제와 함께 파리에 오트 쿠튀르(고급 의상실)를 차리고 그의 이름을 딴 '이브 생 로랑'(YSL) 브랜드를 출범시켰다.

프랑스 여배우 카트린 드뇌브와 그레이스 켈리 모나코 왕비 등 20세기 후반 패션 아이콘들을 '고정 팬'으로 사로잡으면서 패션계를 석권해가기 시작했다.

'YSL'이란 로고는 최신 유행의 상징이 됐다.

이들을 추종하는 세계의 많은 여성들은 그의 옷을 입어보는 게 소원일 정도였다.

1970년대만 해도 유럽 사람들에게 생소한 시장이던 한국 및 일본에 진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생 로랑은 정신적ㆍ신체적 아픔을 품은 채 대중 앞에 얼굴을 드러내기를 꺼리는 '은둔의 거장'이었다.

1971년 내놓은 일부 의상들은 전쟁을 미화한 게 아니냐는 비판도 받았다.

'오피움'이란 이름의 향수는 마약 사용을 미화했다는 비난에 직면해야 했다.

실제로 그는 말년에 "안정제와 마약류라는 나쁜 친구들과 가까이 했다"고 시인하기도 했다.

유병연 기자 yoob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