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집서 멤버 모두 프로듀서로서 완숙미 선보여

"스트레스를 받은 걸로 치면 정말…. 죽을 것 같았어요."(멤버들)

"머리로 계산하지 않고 아무 생각 없이 만들었다"고 호언장담했건만 한곡 한곡 꼽아 설명하더니, 결국 창작으로 흠집난 속살에 미간을 찌푸린다.

"5개월간 힙합듀오 TBNY의 얀키가 오픈한 녹음실에서 숙식했어요. 작업을 마치고 집에 갔더니 가스, 인터넷 모두 끊겼더라고요. 은행에 갈 시간이 없어 지금도 녹음실에 살아요. 빛도 안보고 밤새우며 작업해 속도 아마 썩었을 거예요."(타블로)

그럼에도 그룹 에픽하이의 5집 '피시스, 파트 원(Pieces, Part One)'은 음악을 만들며 살아갈 수 있다는 고마움을 되새김질하며 만든 음반이다.

4집은 팬들이 외면해도 상관없다는 생각에 무겁고 어둡고 칙칙한 사운드로 밀어붙였는데 큰 사랑을 받았고 덕택에 용기를 얻었다.

팬들이 창작 영역의 자유를 허락한 것이라고 고맙게 여겼다.

"어떤 가수는 팬들로 인해 음악적 틀에 갇히는 경우가 있죠. 우리 팬들은 '얘네들 왜 이런 거 했어'란 생각을 안하는 것 같아요. 우린 뭘 해도 받아줄 것이란 막연한 자신감이 생긴 거죠."(타블로)

멤버 전원이 작사ㆍ작곡한 5집은 1년 넘게 틈틈이 쓴 작업물과 즉흥적인 충동이 빚어져 하이브리드도, 크로스오버도 아닌 신선한 감각물로 채워졌다.

"철이 든 건지 모르겠지만, 우리를 돋보이게 할 음악이 아니라 듣는 사람의 편에서 좋은 가요를 담으려 했다"는 음반 수록곡은 차례로 '비(Be)'부터 '연필깎이'까지 타블로, '걸(Girl)'부터 '에이트 바이 에이트(Elght By Eight)'까지 디제이투컷, '데칼코마니(Decalcomanie)'는 미쓰라진이 작곡했다.

이중 타블로가 작곡하고, 피처링한 윤하를 위해 쓴 곡인 '우산'은 무척 감미로워 의외다.

"우린 작업할 때 '대박'으로 즉흥적이에요. 피처링도 갑자기 떠오르는 가수에게 전화하고요."(디제이투컷)

"눈 밟는 소리가 참 예쁘다는 생각에 아버지와의 추억을 담은 곡 '당신의 조각들'에 넣어 소원을 풀었죠. 그 곡의 아이 목소리는 제 조카(형의 아들)예요."(타블로)

"이 생활을 하면서 거울을 자주 보게 됐죠. 저와 솔직한 얘기를 가장 많이 하는 상대죠. '거울 속 나'와 저는 같으면서 다르다는 내용의 곡 '데칼코마니'가 그렇게 태어났어요."(미쓰라진)

타이틀곡 '원(One)'은 당초 록으로 편곡했다.

이때 타블로는 두 가지 생각을 했다.

'갑자기 록을 하기에는 내가 미흡하다' '내가 못하는 건지 랩과 록이 잘 안 묻는다'는 것. 일렉트로닉 스타일에 랩을 뿌렸고 후렴구에 기타 사운드로 무치자 정체불명의 매력을 띠게 됐다.

"어떤 장르를 섞겠다고 의도하진 않았어요. 솔직히 우리도 장르를 잘 모르겠고요. 전화기 소리든 뭐든 곡에 어울리고 우리에게 꽂히면 닥치는 대로 넣었죠."(타블로)

강한 일렉트로닉 사운드가 꽉 채워진 것도 또 하나의 특징. 발맞춰 음반 재킷에도 마치 영화 '트랜스포머'에나 등장할 법한 변신 로보트가 자리했다.

쇳덩이가 모여 사이버 생명체가 태어나듯, 음반은 진실의 조각들로 응집됐음을 뜻한다.

에픽하이가 던지는 멜로디, 가사의 진실성에 대한 얘기로 이어졌다.

"진실되지 않은 마음으로 가사를 쓴다면…. 미치지 않은 한 왜 지하실에 처박혀 가족도 안 만나고 연애도 안 하고, 몸도 썩어가면서 음악을 하겠어요. 치과 가본 지 2년, 병원 진료를 받은 것도 3년이 됐어요. 음반에 '낙화'라는 제 솔로곡이 있는데 '꿈을 좇으며 너무 많은 소중한 걸 잃어가는 건 아닐까'란 절박한 심정이 담긴 곡이죠."(타블로)

이런 작업이 반복되다보니 정규 음반이 짐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꾸준히 정규 음반을 내겠다고 다짐했건만 요즘엔 회의가 밀려오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의 음악을 아껴주는 이들을 위해 오히려 정규 음반을 안 내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서다.

"음반을 만드느라 진을 빼지만 한두 곡 외에 나머지 곡은 다른 가수의 신곡이 나오면 묻혀버리고 말죠. 많은 사람들이 들어주길 바란다면, 오히려 서너 곡씩 담은 싱글 혹은 미니음반이 나을 것 같아요. 음악하기 힘든 현실 속에서 1990년대 제가 그랬듯, 대중이 마음으로 음악을 들어줬으면 합니다."(멤버들)

고집 센 멤버들끼리 음악적인 타협과 절충점을 찾는 방법도 5집을 통해 터득했다.

견해 차로 인한 충돌도 없었다.

"사운드적인 측면, 음악 제작의 방법론적인 면에서 타블로와 전 달랐죠. 타블로는 목소리, 전 악기로 채우는 걸 좋아했어요. 그래서 편곡을 할 때 의견 차가 컸죠. 이번에는 '이거 괜찮네' '어 괜찮다'란 식으로 작업했어요. "(디제이투컷)

"1년간 인생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어요. 음악이 중요하긴 한데, 목숨 걸 정도로 중요할 때도 있지만 가사의 단어 하나에 목을 맬 필요가 없다는 거였죠. 오히려 즐거운 마음으로 작업하는 게 더 소중하다는 걸 깨달았어요."(타블로)

(서울연합뉴스) 이은정 기자 mimi@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