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길진 칼럼] 자식의 나라, 부모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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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슴도치도 자기 자식은 예쁘다고 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 자식. 그러나 그런 애틋한 자식이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부모는 알고나 있는지.
최근에도 명문집안의 부모가 자식문제로 나를 찾았다.
“자식 놈이 문제아입니다.”
부모의 말에 따르면 자식은 못된 짓만 골라 하는 천하의 문제아였다. 나는 자녀를 데려오라고 했다. 몇 마디 말을 나눠보자 금새 실상이 드러났다.
“엄마는 내가 반에서 중간 정도한다고 난리입니다. 그럼 나보다 못한 나머지 아이들은 인간도 아닌가요? 비싼 과외를 하지만 제 공부 실력은 그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공부 잘하는 형이나 누나와 저를 비교하지 마세요. 저는 저입니다.”
자식은 누구보다 자신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대학 진학보다는 언변이 뛰어난 자신의 장점을 살려 일찌감치 장사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쯤 되면 부모가 문제인가 자식이 문제일까. 누가 문제일까. 자식은 지극히 정상적이었다. 공부 잘하는 다른 자식들과 비교하는 부모가 정말 문제였다.
부모의 시각에서 강요된 자식의 길. 그래서 자식이 불행해 한다면 그것이 진정 자식을 위하는 부모의 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자식을 통한 부모의 대리만족 욕구를 자식을 위한다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은 아닐까. 자식이 좋아야 부모가 좋은 것 아니겠는가. 남을 위한다는 ‘위(僞)’자는 그래서 거짓이다.
습한 늪지대는 인간에게 지옥이다. 그러나 악어에겐 천국이다. 인간에겐 위태로워 보이는 나뭇가지이지만 새에겐 천국이다. 이처럼 지옥과 천국은 상대적인 것이다. 부모와 자식이 바라보는 천국은 과연 같은 것일까.
내가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다. 그는 집안은 불우했지만 머리도 좋고 공부도 잘하는 모범생이었지만 매사에 반항적이었다. 홀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그는 6.25전쟁 때 아버지가 월북인지, 납북인지 확실히 모르지만 북으로 갔기 때문에 매사 부정적으로 변했다고 했다. 어머니는 혼자 남은 아들이 잘 되기 많을 빌며 온갖 정성을 다 들였다. 고위 공직자로 장원급제하여 집안을 일으키기 만을 학수고대했다. 당시에는 가진 것 없는 집에서 그 길만이 출세의 지름길 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패싸움 구경을 하다가 싸움 중이던 학생이 그 친구 옆으로 고꾸라졌는데 그만 죽고 말았다. 운이 나빴는지 그는 그 즉시 경찰서로 끌려가 연행되었고 명문고교를 다니다가 하루아침에 소년원으로 추락하고 만 것이다. 새까맣게 탄 어머니의 마음은 불 보듯 뻔했다.
나는 큰마음 먹고 소년원으로 그 친구를 찾아갔다. 가뜩이나 어두운 애인데 소년원에 있으니 얼마나 우울해 할까. 면회실에 앉아 혼자 걱정하며 친구를 기다리는데, 막상 문을 열고 나타난 친구는 환하게 웃으며 반갑게 맞아주는 게 아닌가. 뜻밖의 표정에 순간 당황했다.
"힘들지 않니?"
"힘들긴, 이제야 살 것 같다. 나 엄마 얼굴 보기 싫었거든. 매일 나만 보면 공부 잘해야 한다고 얼마나 구박했는지 몰라. 엄마 얼굴 안보니까 진짜 편하다."
그리고는 어리둥절한 내게 복권 맞은 사람처럼 들떠서 말했다.
"소년원 나오면 군대도 면제란다. 군대 가기 진짜 싫었는데, 나 완전히 횡재했지."
소년원에 들어간 친구는 180도 달라져 있었다. 마치 인생의 커다란 짐을 홀가분하게 벗은 사람 같았다. 아버지가 북으로 가신 뒤, 친구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연명하며 공부만이 성공할 수 있는 길이라며 심하게 잔소리를 했지만 이제 소년원행으로 공부로는 성공할 수 없게 된 것. 어머니가 포기하면서 비로소 아들을 자유롭게 놔주게 된 것이다. 덕분에 친구는 태어나 처음으로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이후 친구의 소식은 자연스럽게 끊어졌다가 얼마 전에 캐나다에서 한 통의 이메일을 받았다. 그는 용케 나를 알아보고 소년원에서 나온 뒤 피혁공장에 들어가 좋은 머리로 피혁사업에 대성공을 거둔 뒤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고 소식을 전했다. 만약 어머니의 계획대로 친구가 공무원 시험을 봤다면 어찌되었을까. 당시 시대상황으로는 북으로 간 아버지 때문에 연좌제에 옭아매어 더욱 좌절했을지 모른다. 그는 이렇게 효자가 되어있었다.
운도 복도 없었지만 한 순간 마음을 비움으로서 드디어 성공의 열쇠를 찾을 수 있었던 친구. 그 친구를 보면서 영혼은 비록 부자지간이라도 누구에게도 속해있지 않으며, 자식은 부모의 연장이 아니란 사실. 악어의 새끼가 악어일 것 같지만 인간은 새를 자식으로 낳을 수도 있다는 것. 그래서 부모의 천국이 반드시 자식의 천국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단적인 경험이었다. 부모의 천국이 자식에게 지옥일 수 있다.
효(孝)라는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만이 효일까. 자식의 영혼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부모의 강요가 과연 진정한 효라 할 수 있을까. 영혼이 성숙하지 못한 채 내세는 획일적인 도덕이나 정의만큼 무서운 게 없다.
자녀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노라면 자식은 과연 부모를 위해 살고 있는지 느낄 수 있다. 예쁜 짓을 하는 것도, 배고프다고 보채는 것도, 아프다고 우는 것도 다 제 살 궁리일 뿐인데 부모의 눈에는 마냥 예뻐만 보인다.
자식도 품안의 자식이다. 어느 순간 자기 짝을 찾아, 자기 길을 찾아 훌쩍 날아가 버린다. 자기 어릴 적만 돌아보아도 그렇다. 자신이 부모에게 도망가려고 산 것이지 부모를 위해 산 기억은 별로 없지 않은가.
내 배속에서 나오고 내 가 밥을 지어 먹이고 내 집에서 재우고 내 돈 들여 학교 보냈지만 부모와 자식은 애초부터 독립된 영혼으로 서로 다른 나라에 살고 있었다. 자식에게 이기는 부모 없다고 했다. 주권을 무시하면 국가 간 내정간섭이고, 그 결과 심각한 분쟁의 앙금뿐이 더 남겠는가. 자식도 완전한 주권 국가로 인정하고 외교를 펼치듯 대해야 한다. 타협에 타협을 거듭하는 외교.
부모에게 자식은 영원한 채권자다. 사채업자보다 무서운 전생 빚 채권자이지만, 빼앗겨도 빼앗겨도 싫지 않다는 점이 다르다면 다를 뿐이다. 빚쟁이에게는 적당히 갚고 빨리 피하는 게 상책이 아닐까. (hooam.com)
최근에도 명문집안의 부모가 자식문제로 나를 찾았다.
“자식 놈이 문제아입니다.”
부모의 말에 따르면 자식은 못된 짓만 골라 하는 천하의 문제아였다. 나는 자녀를 데려오라고 했다. 몇 마디 말을 나눠보자 금새 실상이 드러났다.
“엄마는 내가 반에서 중간 정도한다고 난리입니다. 그럼 나보다 못한 나머지 아이들은 인간도 아닌가요? 비싼 과외를 하지만 제 공부 실력은 그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공부 잘하는 형이나 누나와 저를 비교하지 마세요. 저는 저입니다.”
자식은 누구보다 자신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대학 진학보다는 언변이 뛰어난 자신의 장점을 살려 일찌감치 장사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쯤 되면 부모가 문제인가 자식이 문제일까. 누가 문제일까. 자식은 지극히 정상적이었다. 공부 잘하는 다른 자식들과 비교하는 부모가 정말 문제였다.
부모의 시각에서 강요된 자식의 길. 그래서 자식이 불행해 한다면 그것이 진정 자식을 위하는 부모의 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자식을 통한 부모의 대리만족 욕구를 자식을 위한다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은 아닐까. 자식이 좋아야 부모가 좋은 것 아니겠는가. 남을 위한다는 ‘위(僞)’자는 그래서 거짓이다.
습한 늪지대는 인간에게 지옥이다. 그러나 악어에겐 천국이다. 인간에겐 위태로워 보이는 나뭇가지이지만 새에겐 천국이다. 이처럼 지옥과 천국은 상대적인 것이다. 부모와 자식이 바라보는 천국은 과연 같은 것일까.
내가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다. 그는 집안은 불우했지만 머리도 좋고 공부도 잘하는 모범생이었지만 매사에 반항적이었다. 홀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그는 6.25전쟁 때 아버지가 월북인지, 납북인지 확실히 모르지만 북으로 갔기 때문에 매사 부정적으로 변했다고 했다. 어머니는 혼자 남은 아들이 잘 되기 많을 빌며 온갖 정성을 다 들였다. 고위 공직자로 장원급제하여 집안을 일으키기 만을 학수고대했다. 당시에는 가진 것 없는 집에서 그 길만이 출세의 지름길 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패싸움 구경을 하다가 싸움 중이던 학생이 그 친구 옆으로 고꾸라졌는데 그만 죽고 말았다. 운이 나빴는지 그는 그 즉시 경찰서로 끌려가 연행되었고 명문고교를 다니다가 하루아침에 소년원으로 추락하고 만 것이다. 새까맣게 탄 어머니의 마음은 불 보듯 뻔했다.
나는 큰마음 먹고 소년원으로 그 친구를 찾아갔다. 가뜩이나 어두운 애인데 소년원에 있으니 얼마나 우울해 할까. 면회실에 앉아 혼자 걱정하며 친구를 기다리는데, 막상 문을 열고 나타난 친구는 환하게 웃으며 반갑게 맞아주는 게 아닌가. 뜻밖의 표정에 순간 당황했다.
"힘들지 않니?"
"힘들긴, 이제야 살 것 같다. 나 엄마 얼굴 보기 싫었거든. 매일 나만 보면 공부 잘해야 한다고 얼마나 구박했는지 몰라. 엄마 얼굴 안보니까 진짜 편하다."
그리고는 어리둥절한 내게 복권 맞은 사람처럼 들떠서 말했다.
"소년원 나오면 군대도 면제란다. 군대 가기 진짜 싫었는데, 나 완전히 횡재했지."
소년원에 들어간 친구는 180도 달라져 있었다. 마치 인생의 커다란 짐을 홀가분하게 벗은 사람 같았다. 아버지가 북으로 가신 뒤, 친구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연명하며 공부만이 성공할 수 있는 길이라며 심하게 잔소리를 했지만 이제 소년원행으로 공부로는 성공할 수 없게 된 것. 어머니가 포기하면서 비로소 아들을 자유롭게 놔주게 된 것이다. 덕분에 친구는 태어나 처음으로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이후 친구의 소식은 자연스럽게 끊어졌다가 얼마 전에 캐나다에서 한 통의 이메일을 받았다. 그는 용케 나를 알아보고 소년원에서 나온 뒤 피혁공장에 들어가 좋은 머리로 피혁사업에 대성공을 거둔 뒤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고 소식을 전했다. 만약 어머니의 계획대로 친구가 공무원 시험을 봤다면 어찌되었을까. 당시 시대상황으로는 북으로 간 아버지 때문에 연좌제에 옭아매어 더욱 좌절했을지 모른다. 그는 이렇게 효자가 되어있었다.
운도 복도 없었지만 한 순간 마음을 비움으로서 드디어 성공의 열쇠를 찾을 수 있었던 친구. 그 친구를 보면서 영혼은 비록 부자지간이라도 누구에게도 속해있지 않으며, 자식은 부모의 연장이 아니란 사실. 악어의 새끼가 악어일 것 같지만 인간은 새를 자식으로 낳을 수도 있다는 것. 그래서 부모의 천국이 반드시 자식의 천국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단적인 경험이었다. 부모의 천국이 자식에게 지옥일 수 있다.
효(孝)라는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만이 효일까. 자식의 영혼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부모의 강요가 과연 진정한 효라 할 수 있을까. 영혼이 성숙하지 못한 채 내세는 획일적인 도덕이나 정의만큼 무서운 게 없다.
자녀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노라면 자식은 과연 부모를 위해 살고 있는지 느낄 수 있다. 예쁜 짓을 하는 것도, 배고프다고 보채는 것도, 아프다고 우는 것도 다 제 살 궁리일 뿐인데 부모의 눈에는 마냥 예뻐만 보인다.
자식도 품안의 자식이다. 어느 순간 자기 짝을 찾아, 자기 길을 찾아 훌쩍 날아가 버린다. 자기 어릴 적만 돌아보아도 그렇다. 자신이 부모에게 도망가려고 산 것이지 부모를 위해 산 기억은 별로 없지 않은가.
내 배속에서 나오고 내 가 밥을 지어 먹이고 내 집에서 재우고 내 돈 들여 학교 보냈지만 부모와 자식은 애초부터 독립된 영혼으로 서로 다른 나라에 살고 있었다. 자식에게 이기는 부모 없다고 했다. 주권을 무시하면 국가 간 내정간섭이고, 그 결과 심각한 분쟁의 앙금뿐이 더 남겠는가. 자식도 완전한 주권 국가로 인정하고 외교를 펼치듯 대해야 한다. 타협에 타협을 거듭하는 외교.
부모에게 자식은 영원한 채권자다. 사채업자보다 무서운 전생 빚 채권자이지만, 빼앗겨도 빼앗겨도 싫지 않다는 점이 다르다면 다를 뿐이다. 빚쟁이에게는 적당히 갚고 빨리 피하는 게 상책이 아닐까. (hooa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