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들의 탈(脫)법원 행렬이 길어지고 있다. 지난 21일 정기인사를 전후해 법복을 벗었거나 벗을 예정인 판사는 90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50명 안팎이었음을 감안하면 눈에 띄는 증가폭이다. 사법시험이라는 바늘구멍을 통과한 뒤 사법연수원 성적을 10% 이내로 받은 엘리트 중 엘리트로 평가받는 이들의 엑소더스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갈 곳 있을 때 나가자"

법원행정처 관계자는 "판사임용 숫자가 연 150명 정도로 증가한 것과 맞물린 것 아니겠느냐"고 분석했다. 하지만 꼼꼼히 들여다보면 사정이 그렇게 간단치만은 않은 것 같다.

최근 법원을 등지는 인사들의 면면을 보면 승진에서 탈락했거나 좌천된 인물보다는 '소신파'가 많다. 김앤장에서 새롭게 둥지를 튼 서울고법 김수형 전 부장판사(사법연수원 11기),같은 법원 이영구 전 부장판사(13기)가 대표적이다. 김 전 부장판사는 대법원 재판연구관을 5년 동안 지낸 '실력파'로 알려져 있다. 재계의 저승사자로 불리며,검찰총장감으로 손꼽히던 윤진원 전 서울지검 부장검사가 얼마 전 SK C&C행을 택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갈수록 악화되는 주변환경도 이들의 이탈을 부추기고 있다. 로스쿨 출범과 법률시장 개방으로 외국변호사 등 법조인력의 대폭 증가가 예상되면서 "호시절은 다 갔다"는 위기의식이 확산되는 형국이다. 한 로펌 관계자는 "판.검사 출신에 대한 선호도는 여전히 높은 편이지만 요즘에는 이름값보다 실무능력을 중시하는 게 추세"라며 "전관이 변호사업계에 연착륙하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대접은 예전만 못해

퇴직법관에 대한 대접도 예전만 못해졌다.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가 대형로펌에 영입을 제의했다가 거절당하는 사례도 심심찮게 들린다. 높은 승소율을 자랑하던 '전관예우' 현상이 어느 정도 완화되면서 몸값이 덩달아 하향조정된 측면도 있다. 로펌들도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추면서 부장판사급이라고 무조건 영입하던 데서 벗어나 특허나 행정법원 출신 등을 전략적으로 스카우트하고 있다. 기존 구성원들의 반발도 전관의 로펌행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한 로펌 관계자는 "전관을 파트너 변호사로 영입할 경우 기존 파트너들은 지분이 감소하고 파트너 전단계인 '어소(Associate) 변호사'는 파트너로 승진할 기회가 줄어들게 돼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법무법인 광장의 권순욱 홍보실장도 "광장은 홍경식 전 서울고검장 외에는 아직 확정하지 못했다"며 "어느 정도 덩치를 키운 대형 로펌들은 피라미드 형태의 인력구조가 유지되도록 실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인력을 영입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로펌의 몸집 불리기는 계속된다

법무법인 화우는 최근 박송하 전 서울고등법원장과 이주흥 전 서울중앙지법원장 등 최고위직 법원장 두 명을 동시에 영입했다. 화우는 이들의 영입을 위해 대표변호사 직책을 부여하는 등 많은 공을 들였다.대형 5대 로펌 가운데 송무 비중이 비교적 높은 편인 화우로서는 두 사람의 가세로 송무 전문 로펌으로서의 위상을 강화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김앤장 법률사무소는 올해 김수형 부장판사 등 7명의 퇴임 법관을 스카우트했다. 세종은 이영구 전 서울고법 부장판사 등 5명의 전직 법관을,율촌도 정보기술(IT) 등 전문분야에서 경력을 쌓은 4명의 법관을 각각 영입했다. 소속 변호사 가운데 '전관' 비중이 높은 중견로펌 한승도 전직 부장판사 4명을 영입했다.로고스에는 권남혁 부산지법원장 등 5명의 전직 법관이 둥지를 틀었다.

한승의 임정수 변호사는 "법원 출신 변호사는 송무분야에서 강점을 갖고 있기 때문에 로펌들은 비교적 높은 보수를 주면서까지 영입하려 한다"고 말했다.

정태웅 기자 redae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