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3월 발족한 삼성그룹의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삼성전략기획위원회'는 작년 10월 말 이후 '개점휴업' 상태다.신규사업이나 인수·합병(M&A),미래 사업전략을 수립하는 그룹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맡고 있지만 삼성 비자금 의혹 제기로 기능이 사실상 마비됐다.

삼성의 S(Super)급 인재 확보 전략도 올스톱된 상태.삼성 고위 관계자는 "연일 압수수색이 벌어지고 핵심 임원들이 소환당하는 마당에 글로벌 인재들이 삼성에 오려고 하겠느냐"고 분위기를 전했다.뿐만 아니다.10년 뒤 '먹거리'를 찾기 위한 '신수종 사업 발굴을 위한 태스크포스(TF)'는 출범 후 이렇다할 회의 한번 갖지 못한 채 일손을 놓고 있다.

지난 10일 발족한 조준웅 특별검사팀의 '삼성특검'이 29일로 20일을 맞는다.수사 20일 만에 삼성의 대외 신인도는 땅에 떨어졌고,치밀한 전략수립과 특급인재 유치,절묘한 투자 결정 등으로 대표되는 삼성만의 장기(長技)도 힘을 잃고 있다.

최장 105일간 이어질 삼성특검은 이제 5분의 1가량 지났을 뿐인데 삼성은 벌써 골병이 들고 있다.


◆전략 못 세우는 삼성

미국의 IT(정보기술) 업체 애질런트테크놀로지의 네트 반홀트 회장은 삼성전자의 경쟁력 가운데 하나로 '절묘한 투자 타이밍'을 꼽았다.시장과 경쟁 업체를 둘러싼 수많은 정보를 분석하는 능력과 결단력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얘기다

그러나 요즘 삼성에선 경쟁업체의 허를 찌를 만한 사업 계획 수립이나 과감한 투자 결정 등은 찾아보기 힘들다.큰 그림(전략)을 그려야 할 그룹 수뇌부들이 특검 수사로 인해 발목이 잡혀 있어서다.

그룹의 한 임원은 "요즘 삼성엔 전략이란 게 없다"며 "전략이 없는데 전술이 있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삼성전략기획위원회'의 경우 이학수 그룹전략기획실장(부회장)과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김순택 SDI 사장,이수창 삼성생명 사장 등 9명으로 구성된 삼성의 컨트롤타워지만 비자금 사태 이후 제대로 된 회의 한번 열지 못하고 있다.


◆S급 인재 유치도 올스톱

삼성은 계열사 사장에 대한 인사평가에서 영업실적이나 주가관리 등과 함께 인재 확보 여부를 주요 평가척도로 활용한다.

이건희 회장도 "10만명이나 20만명을 먹여살릴 인재를 유치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해왔다.하지만 비자금 의혹이 제기된 작년 10월 말 이후 삼성의 S급 인재 영입 실적은 '제로(0)'에 가깝다.

그동안 영입에 공들였던 몇몇 해외 특급인재들과의 접촉도 포기했다는 후문이다.업계 관계자는 "고급인재를 외부에서 수혈해 조직에 자극과 활력을 불어넣는 점에서 삼성을 따라올 곳은 없었다"며 "내부 경쟁을 중시하는 삼성의 시스템상 인재를 유치하지 못하면 미래를 장담하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신인도 하락과 경쟁사의 공세

지난주 싱가포르 홍콩 도쿄 등지에서 해외 IR(기업설명회)를 진행했던 삼성전자 주우식 부사장(IR팀장)은 IR와는 상관없는 삼성특검에 대해 해명하느라 진땀을 뺐다.투자자들에게 사태의 경과는 물론 자신도 알 수 없는 전망까지 설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특검 수사 상황이 주요 외신을 타고 실시간으로 전해지다 보니 삼성의 대외 신인도는 갈수록 추락하고 있다.'삼성타도'를 외쳐온 일본 경쟁업체에는 좋은 기회일 수밖에 없다.주우식 부사장은 "일본 업체들은 이번 사태를 호기로 보고 공세를 강화할 태세"라고 말했다.

사업차질 우려도 현실화되고 있다.삼성전자 관계자는 "특검을 핑계 삼아 흑색선전을 퍼뜨리거나 납품단가 인하를 요구하는 사례가 있다"고 말했다.


◆흔들리는 생산라인

삼성전자의 탕정(아산) LCD 사업장 관계자는 "특검이 시작되면 어느 정도 타격이 있을 것으로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특검 여파로 본사의 관리부서는 물론 사업장 생산라인에 근무하는 사원들의 사기도 크게 꺾이고 분위기가 침체됐다."수사받는 기업이 무슨 회식이냐"라는 소리를 들을까 염려해 회식이나 모임을 자제하면서 천안 및 아산 지역의 음식점들이 울상을 지을 정도라는 게 삼성 직원들의 얘기다.

이건호 기자 leek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