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곤씨(46ㆍ서울 목동)는 최근 와인의 빈티지(vintageㆍ포도 수확 연도)에 관한 흥미로운 경험을 했다.

꽤 좋은 빈티지라고 듣고 지난해 여름 프랑스 출장 길에 사 온 '샤토 무통 로쉴드 2003'의 맛이 기대 이하였던 것.몇 달 뒤 추석을 맞아 한 자리에 모인 친척들에게 자랑도 할 겸 내놨지만 다들 떫은 감을 맛 본듯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스스로도 며칠 전 마신,값이 10분의 1도 안되는 이탈리아산 '피안 델레 비네 1999'가 더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문제는 김씨가 빈티지에 관해 잘못된 상식을 갖고 있던 데서 비롯됐다. 김준철 JC와인스쿨 대표는 "빈티지가 좋다는 것은 그 와인의 수명(壽命)이 길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최고의 해에 만든 와인일수록 그 만큼 맛의 절정기가 늦게 찾아오는 법"이라고 설명했다.김씨가 마신 '무통 로쉴드 2003'은 적어도 10년은 기다려야 제대로 된 맛을 음미할 수 있는 와인이라는 것이다.

◆빈티지에 따라 와인값 수십만원 차이

빈티지는 와인의 맛뿐만 아니라 값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다. 보르도 1등급 와인들은 빈티지에 따라 가격이 수십만원씩 차이가 나기도 한다.예컨대 '샤토 라투르'의 경우 2000년산의 출시 첫 해 가격이 135만1000원이었던 데 비해 2002년산은 42만7000원에 불과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가격 격차는 더 커진다.

빈티지의 좋고 나쁨은 기후 등 자연 조건이 결정한다. 김 대표는 "봄철에 적당량의 비가 오고 냉해 피해가 없어야 하며,포도알이 굵어지고 색이 변할 무렵과 수확철엔 일조량이 풍부해야 좋은 해"라며 "척박한 밭에서 자란 포도일수록 땅 속 깊이 뿌리를 내려 여러 지층으로부터 영양을 흡수해 복잡한 맛을 낸다"고 말했다.

와인 평론가들은 지난 수십년간의 빈티지들을 평가,좋고 나쁨을 안내해왔다. 그중에서 1990년 이후 각국별 '랜드마크'가 될 만한 빈티지들은 다음과 같다.미국의 최대 와인 전문지인 와인 스펙테이터에 따르면 프랑스 보르도는 1982년 2000년 2005년을 최고(extraordinary)로 치며,부르고뉴는 2005년이 유일하게 최고로 꼽혔다. 이탈리아 피에몬테의 경우 1996년 2001년 2004년을,토스카나는 2004년이 최고 점수를 받았다. 이 밖에 호주(남부)는 2005년,미국 나파밸리는 2001년이 최고의 해로 꼽힌다.

◆오래 숙성시켜도 안 되는 것은 안 된다



그렇다면 모든 와인들이 빈티지 특성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 것일까. 이에 대해 김새길 대유와인 마케팅 팀장은 "빈티지에 영향을 받는 와인은 극히 한정돼 있다"며 "매년 11월에 나오는 보졸레 누보는 출시되자마자 마셔야 하고,과일향과 신맛이 특징인 화이트 와인은 3년 이내에,5만원 이하의 중ㆍ저가 레드 와인은 5년 안에 마시는 게 가장 좋다"고 설명했다. 그는 "시간을 견딜 힘이 없는 와인을 오래 두는 것은 마치 김치 겉절이를 오래 묵히는 것과 같다"고 덧붙였다.'빈티지 차트(vintage chart)'가 필요한 와인은 흔치 않다는 얘기다.

전문가들은 빈티지의 중요성 역시 나라별로 틀리다고 지적한다. 실제 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럽의 주요 와인 생산국들은 인공적인 관개(灌漑)를 금지해 빈티지별 특성을 살리는 편이지만 미국 칠레 호주 등 신대륙의 대량 생산용 와인들은 관개를 허용,가급적 작황에 따른 편차를 줄이고 있다.

고급 와인은 무조건 좋은 해에 나온 것만 맛있다는 견해도 편견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준혁 신동와인 소믈리에는 "좋지 않은 평을 받은 빈티지는 오랜 숙성을 거치지 않고 빨리 시음 적기를 만날 수 있다는 점과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빈티지 편차 없애기 위해 헬리콥터,인공위성까지 동원

최근 와인업계에 공통된 의견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 중 하나는 '빈티지 차트'의 무용성이다. 와인을 양조하는 기술이 나날이 발전해 자연 조건이 좋지 않은 해에도 와인 메이커의 노력에 따라 최상급의 와인을 생산할 수 있다는 것.

'샤토 무통 로쉴드 2006'이 대표적인 사례다. 보르도의 2006년은 빈티지 자체로는 2005년에 훨씬 밀린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로쉴드 가문은 생산량을 극도로 줄이고 블렌딩 비율을 달리하는 방식으로 와인의 질을 높여 와인 선물 시장에서 2005년보다 약 200유로나 비싼 값에 2006년산을 팔았다.


이준혁 소믈리에는 "빈티지 편차를 줄이기 위한 와인 메이커들의 노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라며 "원하지 않은 때 비가 오면 수분을 증발시키기 위해 헬리콥터를 띄워 바람을 일으키는가 하면 냉해를 막기 위해 포도나무 옆에 난로를 일일이 놓기도 한다"고 소개했다.

우종익 아영FBC 사장은 "유럽 미국 등의 고급 와인 생산자들은 인공위성을 통해 날씨 정보를 파악해 수확 시기를 가늠하곤 한다"며 "와인평론가 로버트 파커가 얘기했듯이 50년,25년 전에 비해 오늘날의 와인이 훨씬 더 우수하고,앞으로 기술이 발전할수록 최상급의 빈티지는 더 많이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