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지일 목사는 한국 개신교의 '살아있는 역사'로 불리는 역사적 인물이지만 아직도 선교활동을 멈추지 않고 있는 '영원한 현역'이다.

백수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캄보디아 베트남 캐나다 태국 등 해외 각지의 선교 현장을 돌며 선교사들을 격려하고 복음 전파의 끈을 놓지 않는다.

일년의 절반은 해외 선교 현장에 나가 있다고 한다.

국내에서도 편히 쉬는 법이 없다.

매주 월요일이면 자신의 집에서 20여명의 목사들을 모아 놓고 성경공부를 한다.

1958년부터 지속해온 '월요 목회자 성경연구모임'이다.

교계의 크고 작은 행사에도 노구를 이끌고 몸소 참여한다.

국내 도서지역 선교에도 열심이다.

'닳아 없어질지언정 녹슬지 않는다'는 게 그의 좌우명.방 목사는 "가만히 있으면 녹이 난다.

멀쩡한 쇠파이프에 녹이 나면 못쓰지 않느냐"며 "일하면서 살자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끊임없이 흐르는 물이 냇물 속의 매끈한 돌을 만들듯 쉬지 않고 일하면 녹슬 틈이 없다고 했다.

실제로 방 목사의 삶이 그랬다.

평북 선천에서 방효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중학교를 졸업하던 해 정오리교회를 개척했고,평양숭실대에 다니면서 야학을 하는 한편 월간지 '게자씨'를 창간했다.

평양 장대현교회에서는 1907년 평양대부흥의 주역인 길선주 목사를 모시고 전도사로 일했고,1937년 목사 안수를 받자마자 미국 유학 대신 중국 산둥성에 선교사로 파송돼 20년간 일했다.

특히 중국이 공산화된 뒤 교단본부의 귀국 명령에도 불구하고 현지에 남아 9년간 수천명의 난민들을 돌보다 공산정권에 의해 강제 추방당한 뒤에야 귀국했다.

교계의 중요한 소임을 두루 맡았던 그는 "교회가 예전만 못한 건 예전만큼 못 믿어서 그런 것"이라며 성경대로 믿고 실천할 것을 강조한다.

최근에는 외아들인 재미사학자 방선주 박사(73)가 한국 근현대사 자료 수집과 정리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아 부자가 국민훈장을 받은 드문 사례를 남기기도 했다.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