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바다에 의지해 사는 사람들인데 이게 도대체 무슨 생지옥인가요."

12일 오전 충청남도 태안군 이원면에 자리잡은 꾸지나무골 양식장.30대 초반의 새댁부터 70대 할아버지까지 이곳 마을 주민 100여명은 한 명도 빠지지 않고 양식장에 모였다.

기름유출 사고의 여파가 양식장이 즐비한 이곳 가로림만 입구까지 미쳤기 때문.비닐옷에 장화를 신고 천조각들을 나눠 가진 이들은 양식장 곳곳에 흩어져 주변 바위에 묻어 있는 시커먼 원유를 제거하기 시작했다.

자원봉사자들의 손길이 미처 미치지 않은 이곳에서 마을 주민들은 생존을 위해 기름과 사투를 벌였다.

"바다에 목숨을 걸고 산다"는 이들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닦아도 닦아도 끊임없이 나오는 기름에,쪼그려 앉은 무릎이 저릴 만도 하건만 힘든 내색 한번 없이 애정을 담아 평생을 가꿔온 양식장의 기름을 묵묵히 닦아나갔다.

한 시간가량 뒤 태안군 보건의료원에서 보내온 앰뷸런스가 도착하자 기름 냄새에 머리가 어지러운 일부 주민들은 조용히 일어나 약을 받아왔다.

그리곤 바로 제자리로 돌아가 기름범벅으로 흡사 자동차 정비소를 연상케하는 양식장 기름을 훔쳐냈다.

이 마을 부녀회장인 문영민씨(50)는 "아무리 닦아내도 다음날이면 더 많은 기름이 바위를 덮고 있어 요즘 무력감마저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이 굴과 바지락을 수확하는 계절인데 양식을 망쳐 생계가 막막하다"고 토로했다.

서해안의 황금어장으로 불리며 관광객들을 끌어모았던 가로림만 일대는 이날 '개점휴업'상태였다.

평소 굴과 낙지를 찾는 손님들로 북적거렸던 꾸지나무골 펜션주택이나 식당들 대부분 문을 닫아놓고 있었다.

꾸지나무골에서 10여분 거리에 위치한 만대마을 상황도 꾸지나무골과 비슷했다.

조금 더 가로림만 안쪽으로 들어온 위치 때문에 이곳 바다의 표면은 괜찮았지만 양식장에서는 매캐한 기름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이곳 어민들은 애써 키워온 굴과 바지락이 쓰레기더미로 변하자 망연자실한 표정이 역력했다.

주민 김홍규씨(64)는 "평소 양식장 옆 백사장을 자유롭게 뛰놀던 인근 민박집 개들도 이제는 바다 근처에도 가려고 하지 않는 마당에 거기서 나온 해산물을 누가 먹으려 하겠냐"며 깊게 팬 주름살 사이로 허탈한 웃음만 지었다.

바닷물을 끌어들여 소금을 만드는 염전 주민들은 벌써부터 내년 걱정이었다.

2월부터 11월까지 소금을 만드는 염전의 특성상 지금 당장은 문제가 없어도 내년 2월부터 기름냄새나는 소금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백화염전의 복승선씨(56)는 "30년간 염전을 운영해왔는데 이런 일은 처음이라며 소금에서 기름냄새가 나면 아무도 사가지 않을텐데 2월까지 남은 기간 동안 상황이 호전되길 기도할 뿐"이라고 말했다.

차를 돌려 30여분간을 달려 도착한 충남 태안군 원북면 시내.점심시간임에도 불구하고 한 집 건너 있는 식당들은 텅텅 비어있었다.

몇몇 식당은 문만 열어 놓고 주인은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몇 집을 돌아다닌 끝에 찾아들어간 식당에서 주인은 이곳을 떠나야 되느냐 마느냐의 문제를 놓고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낙지전문 음식점을 운영하는 이미숙씨(52)는 "20년 동안 살아온 태안을 이제는 떠나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며 "관광객들과 낚시꾼들이 많아 하루에 130만원까지 수입을 올린 적도 있는데 이제는 손님 발길이 끊겼다"고 말했다.

충남 태안군 신진도에 위치한 서산수협 안흥판매사업소의 경매장도 활기를 잃었다.

이날 이곳을 찾은 경매인은 12명으로 평소의 절반 수준.선주 이호범씨(51)는 "5만원을 받던 12㎏짜리 대구 한 상자가 3만8000원,6000원까지 받던 고동 1㎏은 2700원에 팔렸다"며 "태안에서 90여㎞ 떨어진 바다에서 잡아온 대구인 데도 제값을 못받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천혜의 자연환경을 바탕으로 관광객들을 끌어들이던 펜션단지에는 손님 대신 자원봉사자들만 가득했다.

서해안에서 가장 깨끗한 바다로 알려진 신두리 해수욕장 인근 펜션들은 기름 유출 사태로 휴업한다는 현수막을 내걸기 시작했다.

이곳에 위치한 자작나무 펜션은 혹시나 상황이 괜찮아질까하는 기대에 아직까지는 전 직원을 출근시키고 있지만 12월과 1월 예약고객들에게 환불하는 작업을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하고 있다.

직원 권모씨는 "얼마 전 조금 떨어진 거리에 단체고객을 위한 분점까지 냈는데 투자금도 회수하지 못한 마당에 기름 사고가 터져 낭패"라며 "크리스마스를 낀 연말연시가 이곳의 또 다른 대목이었는데 조금이라도 상황이 괜찮아지길 기도할 뿐"이라고 말끝을 흐렸다.

태안=박민제 기자 pmj5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