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없이 '돈 되는 사업'을 찾아나서야 하는 기업들에 다른 기업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서로 같은 업종에 진출하지 말자는 범 LG가(家)의 이른바 '업역 불가침 협정'은 그래서 언젠가는 깨질 수밖에 없는 약속으로 재계는 예상해왔다.

'하늘 아래 새로운 사업'을 발견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최근 들어 범 LG가의 업역 불가침 신사협정이 파기되는 징후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어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2004년 LG에서 계열분리된 LS그룹의 LS전선은 최근 중동시장에서 냉방사업에 뛰어들었다.

자체 개발한 터보냉동기로 대형 빌딩이나 빌딩 집적지의 냉방을 관리하는 공조사업이다.

LS전선은 두바이에 세워질 자동차 테마도시 '모터시티'의 냉방사업을 따내면서 본격적으로 이 시장에 뛰어들었다.

향후 중동 냉방시장의 30%를 차지하겠다는 목표다.

문제는 LG그룹의 주력계열사인 LG전자의 시스템에어컨 사업과 장기적 차원에서 경쟁하게 됐다는 것.LG전자도 시스템에어컨을 앞세운 '냉방 솔루션사업'을 새 성장동력으로 삼고 있다.

게다가 최근 두바이 버스정류장 냉방사업을 수주하는 등 중동시장을 최우선적으로 공략하고 있다.

새로운 캐시카우를 찾는 과정에서 LG그룹과 LS그룹이 시장에서 잠재적 경쟁자로 만나게 된 셈이다.

뿐만 아니다.

LS전선은 LG그룹의 초고속인터넷 업체인 LG파워콤과도 잠재적 경쟁자 입장에 서게 됐다.

LS전선은 최근 케이블TV방송국(SO)의 초고속인터넷 서비스 속도를 200Mbps급으로 높여주는 기술을 개발,성남ㆍ분당지역 SO들을 대상으로 상용화에 들어갔다.

그동안 서비스 속도가 40Mbps 수준에 그쳤던 SO들에는 호재.하지만 조금씩 시장을 잠식해 들어오는 SO들을 방어해야 하는 LG파워콤 등 기존 업체들 입장에선 위협일 수밖에 없다.

흩어진 창업 1,2세 일가들 사이의 경쟁도 가시화되고 있다.

지난 3일 LG그룹에서 완전히 분리된 LG패션은 최근 LF푸드를 설립,외식사업에 진출했다.

현재 7000억원대의 매출을 2015년 목표인 2조5000억원까지 늘리려면 패션사업만으론 불가능하다는 판단에서다.

따라서 향후 3년간 200여억원을 투자해 해외 유명 외식 브랜드를 들여오는 등의 사업계획을 마련 중이다.

이로써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의 첫째 동생인 고(故) 구자승씨의 2세들이 이끄는 LG패션과 둘째 동생인 구자학 회장이 운영하는 아워홈도 외식업계에서 경쟁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아워홈은 급식사업뿐 아니라 서울 파이낸스센터와 GS타워 등 랜드마크 빌딩에서 고급 레스토랑을 운영하며 연간 약 6400억원(지난해)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그룹사들의 '캐시카우'인 건설업에서도 겹치기는 불가피해 보인다.

이미 보험업 중심의 LIG그룹(구인회 LG 창업주의 첫째 동생인 고 구철회씨 일가)이 지난해 중견 건설업체인 건영을 인수,건설업에 뛰어들었다.

GS건설로서는 당혹스러운 일.혹시 LG그룹에서 나오는 건설 물량,이른바 '캡티브 마켓'을 LIG건영에 빼앗기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 때문이다.

게다가 LG그룹도 언젠가 건설업에 진출할 것이란 예측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허창수 GS그룹 회장도 지난달 "LG가 영원히 건설업을 하지 않으리라고 생각지 않는다"며 "우리가 안 하는 분야에 참여하는 데는 반대하지 않는다"는 뜻을 밝혔다.

재계 관계자는 "범 LG가의 업역 불가침 협정이 언제가는 깨지지 않겠느냐는 게 대체적인 예상이었다"며 "신사협정 유효 시한이 있는지 알려지지 않았지만,서로가 양해할 수 있는 수준의 유예기간이 지나면 겹치는 업역이 더욱 많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유창재 기자 yooco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