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HE WALL STREET JOURNAL 본사 독점전재 ]

퇴임 다섯 달을 맞은 자크 시라크 프랑스 전 대통령이 최근 조사를 받았다.

파리 시장으로 재직 시절 공금을 횡령했다는 혐의다.

프랑스에서 전직 대통령이 비리 혐의로 수사를 받는 것은 사상 최초다.

시라크 전 대통령은 지난 몇 년간 여러 가지 비난을 받았다.

시장으로 있을 때 연루된 공동주택 건설 비리가 대표적이다.

시라크의 호화 소비생활은 대중의 의심을 더했다.

사람들은 시라크 부부가 썼다는 하루 600유로의 식비가 과연 먹는 데만 쓰였을지 의심을 품었다.

휴일마다 원거리 여행용으로 지급된 거금에도 관심이 집중됐다.

시라크의 정치적 동료와 후원자들이 조사를 받았지만 침묵을 지켰고 증거는 확실치 않았다.

정작 문제로 떠오른 것은 사소한 것들이었다.

최근 시라크 전 대통령은 20여년 전 집권당 공화국연합(RPR) 당원들을 시청 직원인 것처럼 위장해 일자리를 제공하고 월급을 받도록 한 혐의를 받고 있다.

예전만 해도 이는 법적으로 문제가 안 됐다.

정치인들은 원하는 대로 일자리를 만들 수 있었고 관직을 통해 동료의 뒷자리를 봐주는 것쯤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사법부는 무능했고 언론은 무관심했다.

프랑수아 미테랑과 시라크 대통령은 부패의 한계를 너무 깊이 실험했다.

프랑스 정치인들이 공공주택 건설 계약을 통해 정치자금을 조성한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돌았다.

미테랑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 그의 정부와 숨겨온 딸에게 공공주택을 제공해온 점이 발각됐다.

베레고부아 전 총리는 한 기업인으로부터 무이자로 거금을 빌려쓴 게 알려지자 자살했다.

시라크의 측근이었던 알랭 쥐페 전 총리는 RPR 당직자의 불법 고용사건으로 이미 집행유예 선고를 받은 바 있다.

프랑스 헌법재판소는 1999년 현직 대통령은 기소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

하지만 시라크가 자리에서 물러났으니 죗값을 갚아야 할 때가 왔다.

사실 지난 몇십년간 터진 비리 중에서도 시라크의 이번 혐의는 경미한 편이다.

그는 파리시청에 가짜로 고용된 측근들이 실제로 어떤 일을 했는지 답변을 요구받고 있다.

조사관들이 알아내고자 하는 것은 이것뿐이다.

이외의 모든 혐의는 소송 기한을 넘긴 데다 증거 부족으로 접근하기 어렵다.

25년간 미테랑과 시라크정권 기간에도 많은 것이 변했다.

이제 정당의 재정은 일일이 감독을 받는다.

정치인들은 정해진 수의 정당사무소만 운영할 수 있다.

프랑스 유권자들의 민심도 예전같지 않다.

과거 재정 비리로 은퇴했던 알랭 쥐페 전 총리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사르코지 대통령에 의해 환경장관으로 발탁된 그는 최근 총선에서 무명의 사회당 후보에게 패배하면서 장관직마저 잃었다.

프랑스의 시스템은 여전히 부패의 위기로 가득차 있다.

하지만 프랑스에서 여전히 불순한 것으로 취급되는 경쟁과 개방,세계화는 옛 체제에 새로운 빛을 던진다.

시라크가 앞으로 유죄 판결을 받을 것인지 아닌지는 중요치 않다.

그가 조사를 받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모든 이에게 세상이 이미 바뀌었음을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정리=김유미 기자 warmfront@hankyung.com

◇이 글은 금융논평 사이트인 브레이킹뷰스닷컴의 피에르 브리앙송 파리 통신원이 최근 월스트리트저널에 '시민 시라크(Citizen Chirac)'라는 제목으로 쓴 글을 정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