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드만삭스 출신의 존 테인 뉴욕증권거래소(NYSE) 유로넥스트 최고경영자(CEO)가 세계 최대 증권사인 메릴린치 CEO로 선임됐다.

메릴린치 93년 역사상 첫 외부 CEO다.

존 테인이 메릴린치에 새 둥지를 틀자 이번엔 세계 최대 은행인 씨티그룹이 난처해졌다.

씨티그룹도 존 테인을 차기 CEO로 영입하는 작업을 해왔기 때문이다.

메릴린치나 씨티그룹은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대 금융회사들이다. 두 회사가 연이어 수장을 잃은 것이나 내부 인사 대신 외부에서 CEO를 찾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게다가 존 테인이라는 사람 한 명을 두고 두 회사가 다퉜다는 것 또한 놀랄 만한 일이다.

월가 금융회사 CEO.선망의 자리다.

세계 돈줄을 쥐락펴락한다.

영향력도 막강하다.

보수도 천문학적이다.

잘만 하면 원하는 기간 동안 권력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이들도 꼼짝 못하는 게 있다.

실적이다.

실적 앞에선 이들도 한없이 작아진다.

평소 장기 집권을 위해 경쟁자가 될 만한 사람은 모두 잘라놓아도 실적이 좋지 않으면 그 자신이 먼저 잘리는 게 월가의 생리다.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월가의 정점에 서 있는 사람들이 바로 월가 CEO들이다.

베어스턴스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파문을 수면 위로 촉발시킨 투자은행이다.

지난 6월 말 운용 중인 2개 헤지펀드의 청산이 불가피하다고 고백함으로써 서브프라임 파문을 몰고왔다.

월가가 우왕좌왕하던 7월.베어스턴스 회장 겸 CEO인 제임스 케인은 카드게임 대회에 참석하고 골프를 치기 위해 수시로 사무실을 비웠다.

지난 7월 정상근무일은 모두 21일.이 중 10일을 월가 사무실에 나타나지 않았다.

회사의 운명이 경각에 달려 있는 것처럼 비쳐지고 있는데도 CEO인 그는 개인생활을 유유자적하게 즐겼다.

케인 회장의 이런 생활에 대해 당시 회사의 누구도 문제를 지적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언론에 의해 확인됐을 뿐이다.

이렇듯 월가 CEO는 한마디로 '황제'다.

비록 오너는 아니지만 오너 못지않은 권력을 가진 게 월가 CEO다.

부회장이나 사장은 CEO 바로 다음 서열이다.

그러나 서열만 그럴 뿐,권한은 그렇지 않다.

모든 결정권이나 인사권을 CEO가 갖고 있다.

부회장 등은 그저 참모일 뿐이다.

월가 CEO들이 받는 돈도 천문학적이다.

미국 기업들을 다 합쳐도 월가 CEO의 연봉은 높다.

이번에 그만둔 메릴린치의 스탠리 오닐 전 회장은 작년에 무려 9138만달러(약 840억원)를 연봉으로 챙겼다.

고정 급여는 70만달러에 불과했다.

현금 보너스 1850만달러와 스톡옵션 등이 포함돼 총급여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골드만삭스의 로이드 블랭크페인 회장도 5350만달러를 받아 이름값을 톡톡히 했다.

이어 모건스탠리의 존 맥 CEO가 4140만달러,JP모건의 제이미 다이먼 CEO가 3905만달러를 각각 챙겼다.

캐피털원의 리처드 페어뱅크 CEO도 3744만달러를 거머쥐었다.

실적에 따라 성과급을 지급하는 월가의 관행 덕분이다.

월가 CEO들이 황제로서의 권력과 연봉을 누리기 위해선 한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다름아닌 실적이다.

메릴린치의 오닐 전 회장이 작년 미국 기업을 통틀어 '연봉 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빼어난 실적 덕분이다.

메릴린치는 작년 75억달러라는 사상 최대의 실적을 냈으니 말이다.

그런 오닐도 단 한 번의 실적악화로 날아갔다.

3분기 손실이 22억4000만달러로 93년 회사 역사상 최대를 기록한 데 대해 책임을 졌다.

연간 손실도 아니고 그동안의 성과도 있는데 한번쯤은 봐줄 법도 하다.

그렇지만 어떤 예외도 용납되지 않는 게 월가의 생리다.

'실적 아니면 퇴진뿐(Perform or Die)'이다.

물론 반대의 논리도 성립한다.

실적만 좋으면 만사가 좋다.

천년만년 장수할 수도 있다.

베어스턴스 CEO인 케인과 리먼브러더스 CEO인 리처드 풀드는 1993년에 각각 CEO가 됐다.

벌써 14년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장기 집권이 아니라 영구 집권을 연상케 한다.

이들이 경영하는 동안 실적이 괜찮았기 때문이다.

헨리 폴슨 현 미국 재무장관도 월가의 막강 CEO 출신이다.

그가 세계 최대 투자은행인 골드만삭스 CEO에 오른 건 1998년.그 후 2006년 재무장관으로 발탁될 때까지 8년 동안 골드만삭스를 이끌었다.

그런데 실적이란 것도 상황에 따라 기준이 약간씩 달라진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월가 CEO의 덕목은 '성장'과 '확장'이었다.

누가 덩치를 더 키우느냐에 사활을 걸었다.

그러나 오닐과 프린스 등 외형 확대론자들이 이번 서브프라임 파문으로 철퇴를 맞았다.

반면 골드만삭스 리먼브러더스 JP모건체이스 등 안정적 전략을 취해온 금융회사들은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었다.

그러다보니 다시 월가가 선호하는 CEO의 기준은 안정론자로 바뀌는 분위기다.

외형 확대보다는 리스크 관리를 우선하는 것으로 알려진 존 테인의 몸값이 후끈 달아올랐던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CEO를 퇴출시킨 메릴린치는 보름이 지나서야 후임자를 결정했다.

그것도 외부 인사로 말이다.

씨티그룹은 아직도 후계자를 찾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다.

두 회사 모두 내부에 준비된 후계자가 없었던 탓이다.

이 같은 현상이 빚어진 것은 두 가지 요인 때문이다.

월가의 야만적인 단기 성과주의 문화와 잠재적인 후계자들을 철저히 따돌리는 CEO들의 이기심이 어우러진 결과다.

월가 금융회사들은 복합금융회사다.

투자은행 업무와 소매은행 업무,증권 업무 및 신용카드 업무 그리고 모기지 업무까지 안 하는 게 없다.

CEO는 이들 모든 업무를 총괄하는 자리다.

그런 만큼 모든 업무를 꿰뚫고 있음은 물론 미래의 흐름까지 내다보는 전략적 사고를 가져야 한다.

이런 사람을 길러내려면 CEO의 배려가 필수적이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단기 성과가 지상명령인 상황에서 후계자를 배려할 여유가 없다.

각자 맡은 사업부의 성과가 좋지 않을 경우 당장 목이 날아가는 게 현실이다.

그래야만 실적도 제고시킬 수 있다.

행여 자신에게 돌아올 칼날을 피하는 방도가 되는 것은 물론이다.

서브프라임 파문으로 가장 먼저 퇴진 위기에 몰렸던 베어스턴스의 케인 CEO가 확실한 후계자로 꼽혔던 워런 스펙터 사장을 지난 7월 퇴진시킨 것이 대표적이다.

비단 실적 때문만이 아니다.

누구나 그렇듯이 월가 CEO들은 천년만년 자리를 지키고 싶어한다.

자신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 부상할 경우 자리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

당연히 미리 견제하는 게 상수다.

현재 JP 모건체이스 CEO인 제이미 다이먼은 씨티그룹 전 회장이었던 샌디 웨일의 제자이자 공공연한 후계자였다.

그러나 웨일은 내부 문제로 곤혹스러운 지경에 처하자 다이먼을 가차없이 해고해 버렸다.

메릴린치의 오닐 전 회장은 '후계자를 양성하는 전통을 유지하라'는 이사회의 권고를 깡그리 무시했다.

그러다보니 제롬 케니 부회장 등 핵심 인사들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회사를 떠났고 그것이 최근의 'CEO 구인난'을 초래했다는 분석이다.

씨티그룹에서 프린스 CEO 시절 마이클 던 최고운영책임자(COO)를 비롯 후계자 반열에 올랐던 10여명의 고위직이 회사를 떠난 것도 역시 같은 맥락으로 풀이할 수 있다.

뉴욕=하영춘 특파원 ha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