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당에 사는 김모 할머니(82)는 약에 잘 의존한다.

고혈압 관절염 위염 어지럼증 호흡곤란 등으로 여러 병원을 찾아 처방을 받다보니 서랍 속에 약이 가득하다.

그렇다고 약을 꾸준히 먹는 것은 아니다.

증상이 호전되면 금세 복용을 중단하고 몸에 문제가 생겨야만 보관해놨던 약을 꺼내 먹는 습관을 갖고 있다.

20년 전부터 처방받은 고혈압약도 예외가 아니어서 머리가 아프거나 불편한 증상이 있을 때만 찾아 먹는다.

김 할머니는 1∼2개월 전부터 어지럼증과 소화불량이 심해졌다.

병원에선 '잘못된 약 복용습관' 때문이니 약의 가지 수를 줄이고 약을 정해진 양과 시간에 맞춰 복용하라고 권고했다.

65세 이상 노인의 80% 이상이 한 가지 이상의 만성질환을 앓고 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에 대한 합병증이 늘어나게 마련이다.

노인이 되면 불편한 증상에 대한 인내심이 부족해지는 동시에 약물에 의존해 질병을 치유하려는 성향이 강해진다.

조금만 아파도 병원을 찾기 때문에 처방받는 약의 종류 수는 눈덩이처럼 늘어난다.

미국의 경우 75세 이상 노인은 평균 4.8가지의 약물을 복용하고 있으며 이중 35%는 6가지 이상의 약물을 병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약을 과용하는 한국에선 이보다 심할 것으로 우려된다.

노인 약물 부작용, 일반 성인의 3배

한편으로 노인은 '모든 약은 곧 독'이라는 생각이 강하다.

잘 낫지 않는 질병에 대한 회의가 커서 '약발'도 썩 듣지 않는다.

약물 부작용에 의해 새로운 증상이 나타나면 지병이 악화되거나,노화가 진행된 때문이라고 짐작하고 '약의 위험'을 간과한다.

이 같은 배경 때문에 노인의 약물 부작용은 성인층의 3배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고령화가 일찍 진행된 선진 외국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이처럼 잘못된 약물복용에 의해 유발되는 증상이 10∼35%에 달한다.

가장 흔히 복용하는 고혈압약을 예로 들자.고혈압과 심부전에 효과적인 '안지오텐신 전환효소 차단제'계열 약물은 부작용으로 이따금 마른 기침을 하게 된다.

그런데 환자가 이를 약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다른 병원에서 진해제나 천식약을 처방받는다면 불필요한 고생을 하는 셈이다.

고혈압약을 복용하는 사람이 '알파 차단제'계열의 전립선비대증 약을 함께 먹을 경우 두 약 모두 혈압을 떨어뜨리는 작용이 있어 어지럼증이 생길수 있다.

현기증으로 인한 낙상의 위험도 커진다.

이를 모르면 신경과 이비인후과를 전전할수 있다.

정해진 시간ㆍ양 지키는 게 중요

고혈압약을 먹어 혈압이 떨어지고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다고 해서 운동·식사요법도 하지 않은 채 약 복용을 중단한다면 언젠가 뇌졸중이나 심장병에 처할 위험이 크다.

또 뇌졸중과 심장병은 별개의 질환이라 따로 약을 처방받아 복용할수 있는데 같은 성분을 겹쳐 먹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노인의 약물복용 습관에서 가장 주목되는 위험은 통상 4∼5가지 이상의 약을 한꺼번에 먹는 '다약복용'이다.

9가지 이상이면 노인의 저하된 약물대사기능과 약물 간 상호작용으로 인해 부작용 발생 위험이 급상승하는 것으로 연구돼 있다.

하지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면 2가지 이상만 처방했더라도 △약물 복용이유가 뚜렷하지 않거나 △해로운 상호작용이 나타나거나 △동일 계열·성분 약이 중복 처방됐거나 △약물 부작용을 치료하기 위해 다른 약이 처방됐거나 △약물을 중단했더니 증상이 호전된 경우라면 모두 잘못된 다약복용이라고 볼수 있다.

김광일 분당서울대병원 노인병내과 교수는 "노인은 여러가지 약을 복용해야 하는 불가피한 상황에 놓여있지만 불필요한 약을 줄이고, 비슷한 효과의 약들을 가장 효과적인 약으로 단일화하며, 정해진 시간과 양에 맞춰 약을 복용해야 예기치 않은 약화(藥禍)에서 벗어날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노인은 가급적 운동 휴식 자원봉사 평생교육 노래교실 댄스치료 상담 같은 비약물요법을 먼저 시도해야 한다"며 "주치의나 단골약국을 선정해 중복 처방을 피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약물을 정해진 원칙에 맞게 복용하려면 △복합제와 지속형 제제를 활용하고 △복용이 간편한 제형의 약을 선택하며 △복용시간별로 약제를 묶어 조제하고 △부작용이나 다른 약과의 상호작용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은 약은 가급적 배제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덧붙였다.

정종호 기자 rumb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