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불 가리지 않고 일하다 병원 신세를 지거나,당장 할 일이 없는데도 자정까지 회사에 남아 있거나,주말에도 일거리를 집으로 가져가 일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은 한번 '일중독증'을 의심해봐야 한다.

올해 상반기 기준으로 우리나라 근로자들의 주당 근로시간은 43.7시간.유럽연합(EU) 국가 평균 37.5시간보다 많고 OECD 국가 가운데는 단연 1위다.

우리나라 근로자들은 주당 법정 근로시간 40시간을 초과하는 것은 물론 회사 일을 퇴근 후 집에 가져와 하는 사람들을 주위에서 어렵잖게 볼 수 있다.

요즘 젊은이들이 과거에 비해 일을 열심히 하지 않는다는 비판도 받고 있으나 외환위기 이후 평생 직장 개념이 사라지고 취업난까지 가중되면서 '일중독증'이 양상만 달라졌지 그 강도는 변함이 없다는 분석이다.

일중독증은 정신과에서 질환으로 분류하지 않는다.

임현국 가톨릭대 강남성모병원 정신과 교수는 "불안(강박증),우울증,스트레스로 생긴 내면의 공허함을 일로 채우려는 게 일중독증"이라며 "이는 행복 추구 또는 경제적 보상과 상관없이 자기 과장,부에 대한 강박관념,배우자로부터의 도피,자기 학대 욕구 등이 복잡하게 얽혀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직무 스트레스가 업무에서 오는 스트레스 자체를 의미한다면 일중독증은 이를 이겨내려는 무의식적이고 병적인 대응이라는 것이다.

독일의 신경정신과 의사 페터 베르거는 일중독증을 3단계로 분류했다.

1기는 집에 와서도 일하는 사람,2기는 자신이 일중독증에 걸렸다고 자각해 일부러 취미활동이나 봉사활동에 매달리는 경우,3기는 어떤 일이든 환영하며 주말과 밤에도 일을 하고 약물에 중독된 것처럼 건강이 무너질 때까지 일에 매달리는 경우다.

또 유형에 따라 일중독증을 △몸을 돌보지 않고 일하는 '블루칼라형'(생산직 소방수 농부 군인 등) △휴가가 일하는 것보다 거북스러운 '프리랜서형'(전문직 경영진 고위 간부 등) △할 일이 많고 머릿속이 복잡하나 서성대기만 하는 '햄릿형'(중간 간부 교수 연예인 등)으로 나누기도 한다.

일중독증 양상은 시대에 따라서도 변화한다.

임 교수는 "1970년대 산업화 시기에는 일중독을 미화하는 사회 분위기가 만연했고 상당수가 일중독 증세를 보였다"며 "이후 한동안 개인주의 성향이 강해지면서 감소하는 듯했으나 구인난이 가중되고 구조조정 위험이 상존하면서 다시 늘어나는 추세"라고 지적했다.

또 "요즘 젊은이들이 예전 사람보다 일중독증이 적고 헝그리 정신이 약하다고 보는 것은 편견일 수 있다"며 "일중독증의 빈도나 강도는 세대별로 큰 차이가 없는데 요즘 젊은이들이 보다 개인적인 이익에 집착하기 때문에 그렇게 보일 뿐"이라고 분석했다.

아울러 '슈퍼우먼'으로 불리는 여성들이 같은 성취도를 보이고 있는 남성에 비해 일중독증에 걸린 비율이 높고 심신의 스트레스가 크다고 덧붙였다.

일중독증은 사회적 성공을 보장하고 개인의 성취도를 높이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문제는 방치해둘 경우 대인관계가 악화하고 타인으로부터 고립돼 '외톨이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임 교수는 "일중독증은 스스로 왜 불안해 하는지,사회환경이 일중독증에 미치게 한 영향을 이해하는 것만으로 많이 호전된다"며 "그러나 문제가 심각해지면 스트레스에 대처할 수 있는 정신 상담 치료와 인지 치료를 받거나 항우울제나 항불안제를 복용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일중독증은 알코올중독 쇼핑중독 도박중독 도벽증 게임중독 등과 마찬가지로 '중독'의 한 갈래로서 이해하고 접근해야 한다.

특히 직계가족 중에 이런 중독 성향이 있으면 자신도 같은 경향을 보일 가능성이 높다.

임 교수는 "필요에 따라 하던 일을 중단하거나 미룰 수 있으면 건강한 사람"이라며 "눈앞의 목표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고 장기적인 안목에서 자신의 앞날을 계획하는 습관을 가지면 일중독증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정종호 기자 rumb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