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泰憲 < 고려대 교수·한국사학 >

최근 스웨덴 출신 런던대학 교수가 한국에서 여름강의 도중 김구를 테러리스트로 설명해서 학생의 항의를 받았다고 한 일간지가 보도하자 그 교수는 이를 왜곡보도라고 항변한 일이 있었다.

테러리스트의 사전적 개념을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오늘날 테러리스트는 국제적,사회적으로 민간인 살상을 서슴지 않고 파괴와 불법을 일삼는 부정적 존재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드골이나 레지스탕스를 테러리스트라 부르지 않는다.

안중근이나 김구의 행위 역시 폭력과 살육,주권 침탈에 맞서 민간인이 아니라 적(군 또는 기관)을 대상으로 한 저항이었다.

9·11테러에 동의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대의'를 명분으로 무차별 민간인 살상을 자행했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전쟁을 부채질하는 네오콘이 옳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미국의 일본 원폭 투하나 일본(군)이 자행한 수없는 민간인 학살 또한 반(反)인륜적 테러행위였다.

그런데 권력의 편의대로 기억이 만들어진다.

일본의 여러 박물관은 태평양전쟁 당시 미군의 원폭투하나 도쿄 폭격,침략지 사할린에 억류됐던 일본군을 통해 피해자 상을 주입한다.

반면에 간토대진재 때 자행된 조선인 대학살에 대한 설명은 없거나 한두 마디 언급으로 끝난다.

일본은 국가 차원에서 이제까지 강제동원이나 성노예,침략에 대해 반성과 정리를 한 적이 없다.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이기고 한반도를 강점할 수 있었던 데에는 영국과 미국의 후원(後援)이 작용했다.

그리고는 능력을 넘어선 침략욕구를 아시아해방 또는 자위전쟁이라고 미화할 뿐 희생당한 상대에 대한 생각은 전혀 없다.

이 때문에 A급 전범 도조 히데키의 손녀가 참의원 선거에 출마해 침략전쟁을 자위전쟁으로 강변하면서 피해자 의식을 확산시키는 오늘날 일본사회의 우경화는 심각하다.

얼마전 미국 하원에서 성노예 결의안이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그러나 전후(戰後) 일본의 과거사 정리를 가로막은 것은 미국이었다.

동북아 냉전체제 구축 때문이었으니 이는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이 점에서 독일과 일본은 다르다.

오늘날에는 오히려 만만한 '북한 때리기'를 통해 일본 우경화가 고착돼 가고 있다.

수백만 이웃의 강제동원과 학살,침략의 역사는 일본인의 기억 속에 사라져 가고 있다.

단순히 과거사 인식의 문제를 떠나 일본 우경화(右傾化)는 평화적 동북아의 미래에 암적 요인이다.

암 치료에는 환경을 통한 자연치유 방식도 있다. 남북관계의 평화적 정착이 그것이다.

또 북·미관계의 정상화를 통해 일본의 주변 환경을 바꾸는 길도 있다. 그러면 북·일관계도 정상화되고 이제까지의 냉전적 동북아 환경은 일본 우경화의 서식처에서 일본 사회를 변화시키는 요인으로 바뀔 것이다. 물론 한국 사회도 바뀔 것이다.미래를 위해 과거사를 동북아 구성원이 함께 볼 수 있는 눈도 넓어진다. 한국사회에서 보수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한·미동맹을 남북관계와 택일적(擇一的)으로 설정해 왔다. 그로 인해 적대적 남북관계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보이기도 했다.

한·일 극우세력이라면 국가와 민족을 내세워 대립되게 마련인데 이들이 오히려 반북논리로 서로 통하는 기현상을 연출한다.

그런데 북·미관계는 최종적으로 미국과 북한이 정할 일이고 이미 그러한 추이를 타고 있다. 이제 국가와 민족의 이익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 때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근현대 한국사는 중요 고비마다 최악의 경우만 경험했다.

광해군이나 정조 때에 가능했던 새로운 준비의 계기를 잃은 결과 외압으로 개항이 되었지만,나라를 빼앗길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라를 빼앗겼다.

강점이 되었다고 분단이 필연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결국 분단이 되었다.

62년 전 환희 속에 다가 온 광복은 분단으로 귀결된 것이다.

설령 분단은 됐을지언정 피할 수 있었던 전쟁마저 치렀다.

이후 반세기 동안 남북은 적대적 대립으로 서로를 소진시켰다.

왜 최악의 경우만 우리 땅에서 일어났는지를 따져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 한다.

외세에 눌리기보다 외세를 활용한다는 사고(思考)의 전환이 발전한다면 타개할 방식은 의외로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