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힐 미국 국무부 차관보의 방북을 통해 미국은 두 가지를 입증했다.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으며,북핵 협상에 좀더 유연해졌다는 것이다.

6년 가까이 북한을 '악의 축'으로 몰아붙였던 부시 정부가 임기를 1년 남짓 남기고 대북 정책을 전면 수정하고 있다.

이제는 북한이 비핵화 실천을 통해 화답할 때다.

하지만 전망은 불투명하다.

북·미가 여전히 동상이몽이라는 지적이 나오기 때문이다.

◆북·미 신뢰 쌓았다

힐 차관보는 평양 방문 이틀 동안 박의춘 북한 외무상과 6자회담 상대역인 김계관 부상을 만났다.

박 외무상보다 직급은 낮지만 외교 막후 실세인 강석주 제1부상을 만나 속 얘기를 나누거나 심지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통큰' 제안을 교환할 수도 있다는 기대도 없지 않았다.

힐 차관보는 박 외무상과 '좋은 토의'를 했다고 말했지만 서로의 원칙을 재확인하는 수준이었다.

힐 차관보는 '포괄적 문제'를 해결하기를 원한다며 그 관건이 북한의 비핵화라고 재강조했다.

그러나 미국 고위 관리가 근 5년 만에 방북해 관계 정상화와 한반도 평화 정착에 대한 의지를 천명했다는 점에서 상징적 의미는 크다.

정부 당국자는 힐 차관보의 이번 방북에 대해 "북·미 간 신뢰가 쌓이는 토대를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북·미 동상이몽

그러나 힐 차관보의 방북이 북핵 폐기와 북·미 수교 등 실질적인 성과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북·미 관계에 정통한 서울의 외교 소식통은 "북한은 핵시설을 동결만 해놓은 상태에서 미국과의 협상으로 안전 보장 등 모든 것을 얻어내겠다는 것이고 미국은 북한이 핵무기까지 폐기해야 수교와 평화협정이 가능하다는 입장"이라고 분석했다.

전문가들은 영변 핵시설의 폐쇄·봉인이 성사될 것으로 보지만 시설 '불능화'와 핵물질 신고 등 다음 단계까지 전진할 수 있을지에 대해선 회의적 시각이 강하다.

피터 백 국제위기관리기구 동아시아사무소 소장은 "부시 정부가 융통성을 보인 만큼 북한도 변해야만 돌파구가 마련될 텐데 북한이 다음 관건인 고농축우라늄 프로그램 신고 요구를 수용할지조차 불확실하다"고 말했다.

◆북,동시 행동 원칙 지켜야

백학순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핵은 북한에 유일하게 남은 안보 카드이기 때문에 북핵 협상은 미국이 해결의 계기를 만들어왔고,앞으로도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부시 정부가 중동 문제 해결에 실패했기 때문에 대북 관계에서 업적을 남기려는 욕심을 갖고 있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양자 간 입장차가 크다는 점에서 전망은 대조적이다.

서울의 외교 소식통은 "북핵 상황을 악화시키지 않고 협상의 토대를 마련한 후 다음 정권으로 넘기는 게 한·미 정부의 현실적 목표"라고 지적했다.

반면 백 연구위원은 "미국이 전략적 결단을 내렸기 때문에 북한이 '동시 행동의 원칙'을 실천하면 부시 정부 임기 내 수교까지 가능하다"고 전망했다.

정지영 기자 co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