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 디자이너는 손바닥 크기 만한 공간에 전지 크기 이상의 숨은 내용을 예술적 감각으로 그려내는 사람입니다.

퇴계 이황 선생의 수염을 0.1mm까지 하나 하나 손으로 세밀하게 그려낼 정도로 치밀한 작업을 하지요."

한국조폐공사 디자인조각팀의 김종희 선임 연구원(37)은 최근 24년 만에 새 옷으로 갈아입은 1000원권,5000원권,1만원권을 디자인한 주역이다.

20여명의 동료들과 함께 일하는 그는 요즘 이들 화폐의 위·변조 방지 장치 보완 등 '사후 관리'에 바쁘다.

정부가 5만원권과 10만원권 고액 화폐 발행을 결정함에 따라 후속 작업도 준비해야 한다.

한남대 응용미술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시각디자인 석사 학위를 딴 그가 조폐공사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98년.대학원 졸업 후 2년간 광고대행사에서 근무하다가 '나랏돈'을 디자인하는 일에 매력을 느껴 '평생 직업'으로 선택했다.



도제식으로 운영되는 조폐공사 디자인조각팀에서 화폐를 맡게 된 것은 지난해부터다.

그 이전까지 8년 동안은 우표와 메달 등 조폐공사가 제작을 맡고 있는 다른 부문에서 경험을 쌓았다.

김 선임연구원은 "지폐 속에 그림을 넣는 은화 작업,위조를 방지하는 첨단 기술,디자인의 3박자가 제대로 갖춰질 때 비로소 화폐가 탄생한다"며 "1만원권 등 3종의 새 화폐 디자인을 완성하기까지 20여명의 팀원들이 2년 동안 온갖 작업들과 씨름해야 했다"고 들려줬다.

"지폐 속에 들어갈 소재와 구성 등 모든 것은 한국은행의 화폐도안자문위원회에서 결정됩니다.

화폐 디자이너가 창의적으로 모두 디자인하는 건 아니지요.

한국은행이 여론 조사 등을 수렴해 화폐 디자인에 들어갈 주제·부제를 결정해 넘겨 주면 그때부터 우리가 활동을 시작합니다."

조폐공사의 디자이너들은 정해진 크기의 은행권 규격에 맞춰 수십 개의 위·변조 방지 장치를 적용할 위치,사용 편의성,미적 측면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그 안에서 디자인을 완성한다.

그는 "화폐 디자인은 소재에 대한 자료 조사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며 "사물의 선 하나 하나까지도 정확하고 보기 좋도록 긋기 위해 같은 곳을 여러 번 가 보기도 한다"고 말한다.

새 1만원권 뒷면에 들어간 보현산 천문대 망원경은 촬영과 스케치를 하기 위해 여섯 차례나 현장을 다녀왔다고."한 번은 시원치 않은 차를 갖고 올라가다 엔진이 과열돼 고장 나는 바람에 산꼭대기까지 걸어서 올라갔었죠.무척 고생했어요."

이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지폐 속에 들어갈 디자인들은 역사,미술 분야 등의 학자나 전문가들의 고증을 받는다.

"오죽헌의 창문 창살이 몇 개인지까지도 철저히 검증받죠.그렇지만 일반인들은 잘 모르시고 5000원권에 있는 초충도의 수박이 외국산 수박으로 그려졌다,1만원권의 혼천의가 중국 것이라는 등의 '카더라'식 의혹을 제기하는데,솔직히 기운이 쏙 빠집니다."

3종의 새 지폐를 제작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1만원권 뒷면을 디자인하는 일이었다고 한다.

"혼천의 뒤로 보이는 무수한 별자리가 보이시나요? 하나 하나 정확한 각도와 위치에 배열하는 데 공을 많이 들였습니다."

김 선임연구원은 "이렇게 고생 끝에 직접 디자인한 신권을 온 국민이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동안의 고생이 씻은 듯이 사라지는 느낌"이라고 말한다.

"국민들이 돈의 소중한 가치만큼 돈을 깨끗하게 사용했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덧붙인다.

새 은행권이 발행됐다고 해서 그의 임무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새 은행권이 발행된 이후에도 위조 방지가 취약한 디자인은 피드백을 통해 계속 연구하고 개선시켜 나갑니다.

옛 1만원권도 도면 보안을 높이기 위해 홀로그램 은색띠를 만드는 등 조금씩 디자인을 바꿨던 것과 마찬가지죠."

화폐 디자인은 다른 어떤 분야 디자인보다도 위조 방지와 보안이 중요하다는 설명이다.

대부분의 디자이너들은 자신의 작품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기 위해 노력하지만 화폐 디자이너인 그는 디자인과 관련한 구체적인 내용을 절대 공개하지 않는다.

이처럼 지켜야 할 비밀이 많고 정확성에 대한 스트레스에 시달리지만 그는 한국미술협회에 소속된 엄연한 미술가다.

조폐공사에 입사한 직후 '대한민국 주민등록증 디자인 공모 최우수상'을 받았고 이후에도 '2001년 월드컵 대회 준비 문화관광부장관 표창''2002년 월드컵 대회 성공 개최 유공 표창'을 수상하는 등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그의 동료인 이춘구 과장은 "화폐 디자인이 얼핏 보면 굉장히 까다롭고 딱딱하게 느껴지는 일이지만 그는 섬세한 멋을 아는 디자이너"라며 "조용하면서도 때로는 화려한 이미지로 팀워크가 중요한 우리 디자인조각팀에서 분위기 메이커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안상미 기자 sara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