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앞에 있는 사람이 큰 소리로 좀 불러 주세요."

참석자들이 한꺼번에 우르르 앞으로 몰려들어 스크린을 가리자 참다못한 학부모 한 명이 소리쳤다.

"경영대 390점,법대 392점…." 맨 앞 학부모가 흐린 화면글씨를 간신히 읽어내려간 지 2~3분도 채 못 돼 "자,이제 그만 넘어갑니다"라는 목소리와 함께 화면은 사라졌다. 순간 "안 돼요. 조금만 더~"라는 안타까운 절규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2008학년도 고려대 입학설명회가 열리던 5일 오후 4시. 2000명이 넘는 학부모와 학생들이 참석해 인촌기념관은 발디딜 틈이 없이 붐볐다. 정원이 1000명인 대강의실은 이미 복도까지 꽉 차 버려 나머지 1000여명은 옆에 마련된 대회의실에서 뿌연 스크린을 통해 간신히 설명회를 듣고 있었다.

학교소개 등으로 지루한 1시간30분여가 지나자 드디어 고대하던 순서가 왔다. 지난 3년간 합격생의 상위 75%에 해당하는 '합격안정권' 수능점수를 발표하는 시간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대회의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바닥에 주저 앉아 있던 사람들이 화면을 자세히 보기 위해 앞다퉈 뛰어나가면서 화면을 가려버렸다. 멀찍이서 카메라로 점수를 찍느라 플래시까지 터지자 입시설명회를 진행하던 관계자가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그는 "지금 당장 사진을 지워달라"며 "그렇지 않으면 이공계 수능점수는 보여주지 않겠다"고 협박했다.

고려대는 지난 3월24일 합격안정권 수능점수를 홈페이지에 공개하겠다고 했다가 반나절 만에 철회했다. 대학의 서열화를 부추기는 것 아니냐는 반발이 거셌기 때문. 대신 입학설명회 때 공개하겠다고 약속했었다. "학생들에게 올바른 정보를 줘 현명한 선택을 돕도록 하기 위해서" 비난여론도 감수하겠다는 것이다.

고대 측의 이런 취지에는 공감한다.

그러나 이날 설명회에 참석한 학부모들마저 "수능 점수를 알고 싶어서 먼 걸음을 했는데, 하나마나한 2~3분 점수 공개를 왜 하느냐"며 역정을 냈다. 결국 고대의 점수공개 이벤트는 '생색내기용'에 불과했던 셈이다.

성선화 사회부 기자 d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