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榮奉 < 중앙대 교수·경제학 >

한나라당 내분과 대기업그룹 총수의 폭력사건이 불거지자 조승희 총격사건은 요새 우리의 화제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한국인의 유명한 냄비근성이 과연 근거없이 전해진 말이 아님을 다시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이 충격적 사건을 깨끗이 잊듯이 그동안 떠들썩하던 '민족주의 자성론'도 일회성 이벤트로 망각하는 것 아닐까? 이런 기우(杞憂)에서 필자는 '버지니아 공대 총격사건이 한국에서 터졌다면' 어떤 시나리오였을까를 새삼 연상해 보고자 한다.

사건이 일어나자 반미집단의 촛불시위가 매일 밤 열린다.

시민단체는 시청광장과 대학캠퍼스에 "미국인 영주권자가 한국인 32명을 학살한 현장" 자료를 전시한다.

TV는 과거 백인들이 윈체스터 총으로 어떻게 인디언을 살육했는지 되풀이 방영하며 그들의 태생적 잔혹성이 사건의 원인임을 해설한다.

결국 미국 대통령이 몇 차례 사과한다.

유족들의 울부짖음과 실신장면이 매일 TV를 덮는다.

합동분양소를 차리고 대통령,국회의원,여야의 대선후보자들이 줄줄이 조문하고,가족들은 "내 자식 살려내라"며 대학총장의 멱살을 잡는다.

대통령은 사과하라,경찰청장을 사퇴시키라며 야당 대변인이 성명을 내고 결국 경찰청장이 옷을 벗는다.

국가가 유족대표들과 지루한 보상협의를 마칠 때까지 장례는 연기되고 시민단체들은 합동사회장을 치르자고 유족들을 설득한다.

영구행렬은 깃발과 만장을 휘날리며 미 대사관 앞에서 노제(路祭)를 치르고 무용인의 춤사리로 죽은 영혼의 한을 풀고 장지로 떠난다.

필자가 과장한 측면은 있겠지만 우리사회에 이런 희화적(戱畵的) 수준의 집단적 광기(狂氣)와 배타적 민족주의 성향이 있고 이럴 때마다 대중을 꼬드기는 세력이 있음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반면에 미국인들은 어떻게 이 사건에 이성적으로 대처했는가.

지난 조승희 사건을 통해서도 글로벌시대에 필요한 시민정신을 학습하지 못한다면 자유무역협정(FTA)을 백번 한들 한국인은 지구촌사회에서 존경받는 국민이 되지 못할 것이다.

첫째, 이 사태가 민족적 감정으로 번지는 것을 자제하려던 미국 시민사회의 노력을 배워야 한다. 필자는 이 사건이 장래 미국의 한인사회에 아무 영향도 안 미치리라고 믿지 않는다. 미국인도 이 충격적 사건이 남긴 한국인의 이미지를 잊지는 않을 것이다. 드라마,영화작가들은 한국인을 보다 잔혹한 캐릭터로 그릴 가능성이 있고,교포가게를 지나며 "나도 쏴봐,조(Cho)는 32명 죽였지만 나는 한 명뿐이잖아"하며 신경을 긁는 미국인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지성사회는 이렇게 개인의 문제가 집단,인종 문제로 비화(飛火)함을 자제시키고,제 3자가 개입해 사건을 확대하거나 악용할 언행을 단호히 거부한다.

훈련 중인 장갑차 사고로 죽은 두 여중생 사건을 우리는 어떻게 부풀리고 극화(劇化)시켜 민족의 대사건으로 연출했는지 돌아볼 일이다.

둘째, 미국인들은 국가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

만약 대학이나 경찰이 잘못했다고 판단하면 그들에게 소송을 걸지 국가에 보상금을 내놓으라고 하지 않는다.

우리처럼 대형사건이 터질 때마다 국가가 보상금을 주는 관례는 남한에도 북한처럼 가부장적 사회주의 의식이 뿌리 깊게 박혀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자유민주주의 사상은 개인의 책임과 권리를 강조하지만 우리는 균형과 평등화 정책을 좋아해 개인의 피해를 국민세금으로 보상해주는 관례를 만들었다.

대통령부터 "법보다는 타협"을 강조해온 풍토라서,멱살잡이와 지도자의 시혜에 따라 보상금이 들쭉날쭉 하는 경우를 만들었다.

미국인들은 이성적이지만 감정에 호소해 울고불고하는 우리보다 훨씬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수시로 보여준다.

사회의 낙오자 시설에서 자원봉사하고 장애자를 입양해 기르고 기부를 생활화함에 있어서 우리는 그들을 도저히 못 따른다.

단지 우리 공영방송이 이라크나 노근리 사건만을 주로 비추기 때문에 우리가 잊고 살 뿐이다.

조승희 사건은 우리에게 선동에 휘둘리지 않고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시민이 선진사회로 가는 조건임을 가르쳐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