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시스템의 역할이란 잉여자금을 모아 자금이 필요한 곳으로 공급해 주는 자금중개를 통해 경제성장을 도모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마다 역사적 배경,경제적 환경 등에 따라 금융시스템의 성격이 다를 수 있는데,자금중개의 주된 경로가 어떠한지에 따라 통상 은행중심(bank-based) 시스템과 시장중심(market-based) 시스템으로 분류된다.

은행중심 시스템이란 은행의 예금 및 대출업무를 통해 자금이 모집되고 중개되는 것을 말한다.

자금의 공급자와 수요자가 직접적으로 거래하지 않고 은행을 매개로 자금 이동이 이루어지므로 간접금융 시스템이라고도 한다.


이에 반해 시장중심 시스템이란 자금의 공급자와 수요자가 자본시장을 통해 직접적으로 자금 중개가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하며 직접금융 시스템이라고도 부른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이 두 가지의 자금중개 경로가 모두 작동하지만 어느 쪽의 비중이 큰가에 따라 그 나라 금융시스템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일본,독일 등은 은행중심의 시스템을 가진 나라이고 영국,미국 등은 시장중심의 시스템을 가진 나라로 분류된다.

한 때 이 두 금융시스템 중 어느 쪽이 경제성장에 있어 우월한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1980년대에는 일본과 독일의 높은 경제성장으로 인해 은행중심의 금융시스템이 관심을 끌었으며,1990년대에 들어서는 일본과 독일 경제가 미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침체하자 시장중심의 금융시스템이 우월하다는 주장이 부각되기도 하였다.

그 후 꾸준한 연구를 통해 경제학자들이 이끌어낸 합의(consensus)는 '금융발전이 경제성장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분명하지만 특정 금융시스템이 다른 금융시스템에 비해 상대적으로 우월하다는 증거는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한 나라의 금융발전이 어떤 시스템에 기초를 두고 이루어지든지 관계없이 그 발전의 정도 자체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금융발전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은 어떠한 것이 있는가? 여러 실증적 연구들을 종합해 보면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로 계약관련 법체계의 효율성을 들 수 있다.

즉 자금의 주된 중개 경로가 은행이든지 자본시장이든지 상관없이 금융시장에서 거래당사자 간의 계약을 효율적으로 집행할 수 있는 법체계가 있어야 금융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고,이는 다시 경제성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연구결과는 금융발전은 물론 보다 일반적으로는 시장의 발전에 관해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 준다.

금융시장에서의 거래란 대부분 명시적·암묵적 계약의 형태를 띤다.

계약이란 결국 어떤 조건 하에서 특정한 거래행위를 하기로 하는 약속이다.

간단한 예로 은행대출을 생각해 보자.대출은 일정 기간(만기) 이후 몇 %의 이자율로 원금을 상환하겠다는 약속을 동반한다.

대출계약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정해진 약속을 강제하거나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경우에 대한 제재할 수 있는 법체계가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대출금 상환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빈번할 것이며,결국에는 대출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금융시장에서의 거래는 일반 상품시장에서의 거래보다 훨씬 더 복잡한 계약의 형태를 띤다.

특히 파생금융상품이 발달한 요즈음의 금융시장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계약관련 법체계 및 제도의 발전 없이는 금융계약의 집행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또한 계약관련 법체계의 발달을 통해서 투자의 투명성 및 투자결과에 따른 성과배분도 명확히 이루어질 수 있으므로 투자자의 권리도 신장된다.

금융거래에 있어서 법체계의 효율성은 결국 재산권제도의 발달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금융계약도 결국 현재 또는 미래의 재산권 이전에 대한 약속이다.

이 약속이 잘 지켜질 수 있도록 관리되고,이 과정에서 계약자의 권리가 보장되는 체제가 결국 재산권제도가 잘 발달된 경제체제라고 할 수 있다.

즉,정교하고 효율적인 재산권제도가 있는 경우보다 복잡한 금융거래도 이루어질 수 있고,이는 전체적인 금융발전으로 이어진다.

재산권제도는 시장경제를 떠받치는 가장 기본적인 하부구조(infrastructure)이며 거래의 지속성과 안정성을 보장한다.

때때로 특정 부문의 발전을 위하여 새로운 시스템 또는 제도 등이 도입되기도 하지만 거래의 근간을 이루는 재산권제도의 확립이 제대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면 해당 부문의 발전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결국 대상이 금융시장이든 상품시장이든 새로운 정책적 시도에 앞서 시장거래를 활성화할 수 있는 하부구조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는가를 먼저 살펴보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이태규 < 한경硏 연구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