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권에 불안 느낀 상장기업…자사주 매입ㆍ배당에 돈 쏟아부어
증시가 기업들의 자금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고 있다.

상장사(유가증권시장 기준)들이 증시에 투입한 자금이 증시를 통해 조달한 자금보다 무려 3배가 넘는다.

마땅히 투자할 곳을 찾지 못하고 경영권에 불안을 느낀 상장사들이 주주들의 압력에 굴복하거나 경영권 안정용으로 자사주 매입 또는 배당에 돈을 쏟아붓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증권시장의 역할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상장 폐지를 진지하게 검토하는 상장사도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유가증권시장에서 기업들은 현금 배당으로 11조8402억원,자사주를 직접 사거나 신탁 계약을 체결하는 데 7조3234억원 등 모두 19조1636억원을 지출했다.

이에 비해 유상증자(2조3939억원)나 기업공개(1조1167억원) 등으로는 5조9939억원을 조달했다.

지출액의 3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하지만 코스닥시장은 기업들이 증시에서 조달한 자금 규모가 시장에 투입한 자금보다 5배 이상 많았다.

유상증자(2조692억원)와 주식 관련 사채(2조4514억원)로 조달한 규모만 4조원을 훌쩍 넘었다.

김성주 대우증권 투자전략파트장은 "벤처기업이 많은 코스닥시장은 자금 수요가 많고 주주 환원보다는 성장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김형태 증권연구원 부원장은 "기업의 유보 자금은 주주의 몫인 만큼 주주 환원의 방향은 맞다"면서 "유가증권시장의 자금 조달 감소는 시장 자체 문제라기보다 우리 경제나 산업구조와 연관시켜 봐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수년간 실적 호전으로 유보한 자금은 많으나 투자할 곳이 마땅치 않아 빚어진 결과라는 설명이다.

상장사들의 고배당이나 자사주 매입은 주주 행동주의의 확산에 바탕을 두고 있다.

외국계 기관투자가들의 거센 요구가 최근 '배당 잔치'를 불러왔다.

12월 결산 법인 중 금호타이어 고려시멘트를 비롯한 몇몇 기업은 순이익보다 몇 배 많은 배당을 실시했다.

코스닥의 참테크 파인디지털 등은 적자에도 배당을 토해냈다.

지난해 12월 결산 법인의 배당금 총액 중 외국인에게 지급한 금액은 5조3600억원으로 전년보다 28.79%나 증가했다.

은행을 중심으로 외국인 주주들의 배당 압력이 기승을 부린 결과다.

외환은행 매각에 실패한 론스타는 올초 배당을 통해 4000억원이 넘는 금액을 거둬갔다.

국민은행도 1조원이 넘는 금액을 외국인에게 배당으로 지급했다.

업계 관계자는 "무리한 배당은 기업의 투자 여력을 낮춰 장기 성장성이나 재무구조에 치명적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

기업들의 자사주 매입도 적대적 M&A를 막기 위한 수단으로 크게 늘었다.

적대적 M&A 위협에 노출된 적이 있는 SK㈜는 1조4000억원어치의 자사주를 매입했고 KT&G 포스코 등도 4000억원이 넘는 자사주를 사들였다.

김학균 굿모닝신한증권 연구위원은 "증시가 주주 이익을 위해서만 존재한다면 부동산 시장과 다를 게 무엇이냐"며 "현재 유가증권시장에 상장한 대기업들은 투자를 하지 않고 주주 자본주의라는 이름으로 돌려주는 데 집중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기업들의 상장 유지 비용이 지나치게 높은 것으로 지적받으면서 상장의 이점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도 나오고 있다.

자본 조달 창구로 주식시장의 활용도가 크게 떨어지는 데다 국내 증시가 글로벌 동종 기업에 비해 할인 가격에 거래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주주 행동주의를 표방하는 펀드들이 잇달아 '경영 참여'를 내세우며 투자를 확대하면서 적대적 M&A를 막기 위한 비용도 만만찮게 지불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병호 골드만삭스 한국대표는 "한국 상장사 중에는 굳이 상장을 유지할 명분이 약한 기업이 꽤 많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상장 폐지를 검토 중인 곳도 있다.

2005년 상장한 B사는 한 외국계 펀드로부터 공개매수를 통한 상장 폐지를 제안받기도 했다.

2006년 코스닥시장에 이름을 올린 IT장비 업체도 비슷한 제안을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공개매수를 통한 자발적인 상장 폐지는 2002년 1개사에서 2003년 2개사,2004년 6개사,2005년 7개사로 증가했다.지난해에는 없었다.


서정환 기자 ceose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