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덕수 국무총리가 인사청문회를 무사히 마친 이달 초다. "총리는 가을이면 힘이 빠질텐테. 모셔봤자 효과 보겠어." 귓전을 때리는 총리실 모 수석비서관의 대답은 쇼킹했다. 올 가을 국제행사에 총리가 참석해달라고 협조요청을 하는 자리였다. 최측근에서 총리를 모시는 이의 배포가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어차피 한 총리는 대통령과 임기를 같이하는 '시한부 총리'인데 뭘 그렇게 치근대느냐는 투였다. 아무리 협조요청이 귀찮더라도 분명 선을 넘은 발언이었다.

어처구니 없는 총리실 풍경은 '시리즈'물이다. 이달 중순에는 국내 경제관련 행사에 총리를 초청해 취재하고 싶다는 협조공문을 총리실에 접수시켰다. 그러나 2주가 지나도록 총리의 참석 여부가 무소식이었다. 물어보니 실무부서가 공문을 받아놓고 총리에게 보고조차 안했다. 하물며 일반인이 민원을 넣었더라면 어떻게 됐을지.

앞서 지난 9일 여의도 국회 정치·통일·외교·안보분야 대정부 질문장에서는 총리실이 연출한 한 편의 코미디가 국회의원들의 실소를 자아냈다. 한나라당 김희정 의원실의 질의문이 총리에게 사전 접수되지 않은 탓에 한 총리가 곤욕을 치른 것. 김 의원은 질의시간 대부분을 "(총리실에) 질의문을 건넸는데 왜 준비 안 해왔느냐"고 따졌고,총리는 "질의문을 보지 못했다"며 강변하는 웃지 못할 촌극이 벌어졌다.

이런 일련의 기강 해이를 한 총리는 미리 짐작했을까. 그는 취임 직후 총리실 수석비서관들과 오찬을 하면서 '카리스마'분위기를 연출했다고 한다. 총리실 업무에 정통한 한 총리가 취임해서 직원들이 일하기 편해질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한 총리는 연신 "그 정도로 되겠느냐"며 수석비서관들을 질책했다. 모 수석비서관실에는 직원들이 맡고 있는 일을 개인별로 일일이 적어내라는 초등학교 선생님 같은 지시를 내렸다.

정부 정책을 적극 알리고,정부 시책이 국민과 기업의 피부에 와 닿는지 살피기 위해 눈과 귀를 활짝 열어 놓고 민생·경제현장을 발로 뛰고 싶다는 게 한 총리의 취임 일성이었다.

직원들과 참모들이 "힘 빠질 총리" 운운하며 눈과 귀를 막는다면 노 정권 마지막 총리의 '레임덕'은 이미 시작됐다.

정치부 김홍열 기자 com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