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참으로 길이 많다.

그런데도 길은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어느 한 곳 닮은 구석이 없이 제각각이다.

길이라 해도 쭉 뻗은 신작로가 있는가 하면 비탈길,고샅길,두멧길,뒤안길,벼랑길,사행길 등 생긴 형태에 따라 이름도 부지기수다.

사람들은 이런 길을 따라 살아가고 있다.

신작로를 달리면서는 시원해 하고,벼랑길을 오를 때는 힘들어 한다.

과수원길을 걸으면서는 동심에 젖고,첫눈 내리는 길에서는 낭만에 흠뻑 빠져본다.

그런가 하면 낙엽 구르는 길에서는 삶의 까닭을 음미해 보고,꽃길에서는 마냥 행복한 마음에 들뜨곤 한다.

번뇌가 일면 떠나는 것도 길이다.

아픔을 삭이며 나서는 길은 고되기만 한데 그래도 길은 위안을 준다.

가까운 것들을 물리치고 가는 홀가분함도 있다.

가다 보면 인적이 드문 자갈길도 맞닥뜨리고 번잡한 도시의 아스팔트길도 만나게 되는데,그 길을 오간 사람들의 애환을 더듬는 재미도 쏠쏠할 듯하다.

추억이 깃든 길은 언제든 다시 걷고 싶은가 하면 연인과 같이 가는 길은 정겹고 가볍기만 하다.

이런 길들에 고유의 이름이 붙었다.

지난 5일부터 전국 101개 시·군·구에 '도로명 새 주소'가 도입됐기 때문이다.

'무슨 동 몇 번지'에서 '무슨 도로 몇 번'식으로 바뀌는 것이다.

도로의 진행방향에 따라 일련번호가 부여되는데,국제적 관례에 따라 도로의 왼쪽 건물에는 홀수,오른쪽 건물에는 짝수가 주어진다.

우리나라 주소 체계는 1910년 일제가 을사늑약을 체결하면서 식민통치의 수단으로 토지 및 임야조사사업을 벌였는데,당시 지적제도가 도입되면서 토지의 일정한 구획을 표시한 지번이 그 뿌리가 됐다.

따라서 이번 주소교체는 거의 100년 만에 이루어지는 셈이다.

2012년부터는 새 주소만 사용된다고 한다.

앞으로 모든 길들은 지번이 아닌 이름을 갖고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우리네 삶과 떼어 놓을 수 없는 길에 이왕이면 산뜻하고 밝고 의미있는 이름들이 붙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박영배 논설위원 youngba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