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투사들의 숨막히는 신경전은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됐다.

상대방의 칼 끝에 눈을 감으면 지는 것이다.

1일 밤 한국 경제의 운명을 갈라놓을 한·미 FTA 최종 담판을 위해 김현종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48)과 카란 바티아 미 무역대표부(USTR) 부대표(39)가 다시 마주 앉았다.

더 이상 협상할 시간은 없다.

결단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두 사람은 속이 타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극적 타결을 이뤄내기까지는 피를 흘리지 않았을 뿐 적의 희생을 강요하는 지난한 전쟁이 계속됐다.

한·미 FTA 체결을 이끌어낸 주인공인 김현종 본부장과 카란 바티아 부대표는 닮은 점이 많다.

두 사람은 미국 컬럼비아대 동문이며 로스쿨을 나온 뒤 변호사와 대학교수를 지냈다.

젊은 나이에 고위급 관료를 맡고 있다는 점도 닮은 꼴.

김 본부장은 노르웨이 대사 등을 지낸 외교관 김병연(77)씨의 아들.초·중·고 학창시절을 대부분 외국에서 보냈다.

컬럼비아대에서 국제정치학을 전공한 뒤 같은 대학 로스쿨을 졸업하고 미국 현지 로펌에서 4년간 일했다.

한국의 법률사무소로 옮긴 후 1993년 홍익대 겸임교수를 맡기도 했다.

외교통상부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95년 통상자문 변호사를 맡으면서부터였다.

1999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세계무역기구(WTO) 사무국 법률자문관으로 일했다.

김 본부장은 2005년 9월 남미 순방길에 오른 노무현 대통령과 전세기 안에서 독대했다.

이 자리에서 "선진형 통상국가로 가려면 미국과 FTA가 필요합니다"라며 한·미 FTA 필요성을 설명하고 권유해 결국 대통령의 승인을 받아냈다는 후문이다.

인도계 미국인인 바티아 부대표는 프린스턴대를 나와 컬럼비아대 로스쿨을 졸업한 뒤 역시 로펌에서 경력을 닦았으며 1999년부터 4년간 조지타운대에서 교수생활을 했다.

2001년 조지 부시 행정부와 인연을 맺어 상무부를 거쳐 2003∼2005년 교통부에 근무하면서 중국 인도 등 20여개국과 항공협정을 성공적으로 타결지어 능력을 인정받았다.

이번 협상의 또 다른 주역은 김종훈 한국 측 수석대표와 웬디 커틀러 미국 측 수석대표.외신기자들은 이번 협상을 "웬디와 종훈의 전쟁(Battle rounds by Wendy and Jong-Hoon)'으로 불렀다.

외무 관료인 김 대표는 외국산 담배,마늘협상,자동차시장 개방 등 굵직한 통상협상을 깔끔하게 처리해 통상협상 전문가로 명성을 얻었다.

커틀러대표는 칼라힐스,샬린 바셰프스키,수전 슈워브 등 '냉정함'으로 악명 높은 미국 여성 통상전문가의 계보를 잇는 대표주자다.

두 사람은 1년 넘게 맞수로 만나면서 협상장 안에서는 한치의 양보 없는 신경전과 때로는 도발적인 멘트로 상대를 흥분시키는 싸움꾼으로 행동했다.

백발인 김 대표의 강인한 인상과 징그러울 정도로 침착하면서도 냉정한 커틀러 대표의 쌀쌀한 이미지가 부딪칠 때마다 "협상이 끝장나는 게 아니냐"는 관측까지 나올 정도였다.

협상 초기 김 대표가 "1차 협상이 탐색전이라면 앞으로는 샅바잡기-힘 쓰기-배지기의 순서로 공격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이에 커틀러는 "쇠고기 없이 FTA 없다"며 초강수로 맞섰다.

두 사람의 신경전이 최고조에 달한 것은 지난 5차 협상 때 기자회견이었다.

커틀러 대표가 "쌀 문제도 곧 논의하겠다"며 한국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자 김 대표는 "쌀 문제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고 앞으로도 미국이 한마디도 못하게 하겠다"며 맞불을 놓았다.

두 사람은 2005년 11월 부산에서 열린 APEC 정상회의 준비 대표단 멤버로 만난 이후 1년5개월째 파트너로 지내왔다.

이 과정에서 미운 정,고운 정이 다 들었다.

4차 협상이 한창이던 지난해 10월 제주 신라호텔.협상의 실타래가 좀처럼 풀리지 않자 김 대표는 밤중에 커틀러 대표를 만났다.

커틀러 대표가 "피를 말리는 통상협상처럼 힘든 게 없다"고 토로하자 김 대표는 "우리는 전생에 남을 죽여야 내가 사는 글래디에이터(검투사)였나 보다"며 위로하기도 했다.

장진모 기자 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