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최대 자동차그룹인 독일 폭스바겐은 지난 12일 벨기에 브뤼셀에 있는 아우디공장 노조와 현장직 근로시간을 현행 주당 35시간에서 38시간으로 연장하는 데 합의했다.

4개월간에 걸친 지루한 협상의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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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근로시간 3시간 연장에 따른 임금 보전이 전혀 없다는 점에서 합의라기보다는 회사 측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난 셈이다.

아우디 측은 당초 공장 폐쇄라는 배수진을 치고 20%의 임금 삭감을 요구하는 강공책을 폈다.

협상 타결 다음 날인 13일 기자가 그곳을 찾았을 때 근로조건 악화를 비난하는 노동자들의 시위나 회사 측을 규탄하는 현수막은 찾아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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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을 나서는 한 근로자는 "일자리와 임금을 보전할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며 오히려 안도감을 표했다.


공장 폐쇄와 이전을 무기로 서유럽의 귀족적 노동 관습과 맞서는 기업은 폭스바겐뿐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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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사무용품 제조업체인 스메드는 주당 근로시간을 4시간 늘렸고 독일 보쉬,지멘스 등은 임금 삭감에 성공한 경험도 갖고 있다.

이제 생산목표를 맞추기 위한 무보수 근로시간 연장은 유럽 기업의 일반적인 경영 풍토로 자리잡는 양상이다.

EU 집행위의 한 관계자는 "노사 협상이 점차 기업은 비용 감소,근로자들은 직장 보장 쪽에 무게를 실으며 상호 윈-윈하는 추세"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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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고용비용이 비싼 국가일수록 경쟁력 확보를 위한 노동시장 유연화 작업에 보다 적극적이며,파트타임 근로자들의 사용 확대가 그 예라는 게 윤재천 KOTRA 암스테르담 무역관장의 설명이다.

네덜란드의 경우 지방 노동사무소 승인을 받아야 정규직 해고가 가능한 까다로운 고용 규정을 감안,1년 기간의 임시직 고용을 세 차례 연장이 가능하도록 편법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독일도 무조건 해고가 가능한 이른바 인턴기간을 과거 6개월에서 2년,프랑스도 3개월에서 2년으로 연장했다.

법인세 인하 경쟁은 기업의 엑소더스를 막기 위한 'race-to-the-bottom'의 대표적 사례다.

한때 40%에 육박했던 네덜란드 법인세율은 지난해 29.6%,올해는 최대 25.5%까지로 낮아졌다.

한국(27.5%)보다 낮은 수준이다.

덕분에 서유럽 15개 회원국의 평균 법인세율은 1996년 38.1%에서 지난해는 30% 밑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동유럽 10개국의 평균 20%보다는 여전히 높은 편이어서 인하 경쟁은 앞으로도 이어질 전망이다.

기업 및 노동정책에 관한한 유럽 정당의 고유한 색깔을 구별할 수 없는 점도 주목할 만한 변화라는 게 조병휘 KOTRA 브뤼셀 무역관장의 지적이다.

보수당 노동당 사회당 등 정당에 관계없이 기업 우선 정책을 펴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토니 블레어 총리가 이끄는 영국 노동당은 마거릿 대처 전 보수당 총리의 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아 파업 없는 영국을 만들어냈다.

독일 사민당 출신인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총리는 노동시간 규제 완화,사회복지 축소를 골자로 하는 '아젠다 2010'을 추진했고,후임인 기독교민주연맹 앙겔라 메르켈 현 총리는 전임자의 정책을 확대 계승하고 있다.

지난해 복지국가의 대표 격인 스웨덴에서 사민당이 집권 12년 만에 중도우파에 권력을 넘겨준 것도 지나친 복지정책에 대한 우려의 반영이란 분석도 있다.

지금 유럽 대륙은 소셜 덤핑을 무기로 생산기지 수성 전쟁이 한창이다.

브뤼셀ㆍ암스테르담ㆍ런던=김영규/바르샤바ㆍ프라하ㆍ부다페스트=안정락 기자 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