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희와 좌절,다시 환희로 거듭난 17년의 대장정.'

이봉주가 서른일곱의 나이에 '제3의 전성기'를 열었다. 1970년 10월생인 이봉주는 우리 나이로는 서른여덟이다. 불혹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봉주가 처음 풀코스 마라톤을 뛴 것은 1990년 10월 제71회 전국체전. 스물을 갓 넘긴 새내기 마라토너가 2시간19분15초로 2위를 차지하자 마라톤계가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0년대 한국 마라톤을 주도했던 승부사인 고(故) 정봉수 감독 사단에서 세계적인 철각으로 거듭났다.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이봉주는 2시간12분39초로 은메달을 목에 건다. 하지만 시련이 찾아왔다. 1999년에 발생한 이른바 '코오롱 사태'로 팀을 떠나고 한동안 방황해야 했다. 최대 위기였다.

삼성전자 육상단에 새롭게 둥지를 튼 이봉주는 2001년 도쿄마라톤에서 2시간7분20초로 한국기록을 세우며 부활을 알렸다. 하지만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선 레이스도중 넘어지는 불운 속에 24위에 그쳤다.

가장 극적인 순간은 2001년 4월17일 제105회 보스턴마라톤. 서윤복 함기용옹의 발자취를 더듬어 반세기 만에 세계 최고 권위의 마라톤대회에서 우승한 그는 귀국직후 카퍼레이드를 펼치며 올림픽 우승자 못지않은 영웅으로 떠올랐다.그러나 이봉주는 또 시련에 휩싸였다. 2001년 에드먼턴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는 처음으로 레이스도중 '타월'을 던졌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에서 함봉실과 남북 동반 우승을 해냈지만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서는 14위로 또 좌절했다.

은퇴 얘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지구력과 더불어 스피드를 중시하는 추세로 바뀐 세계 마라톤의 흐름을 더 이상 쫓아가기 힘들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그러나 이봉주는 포기하지 않았다. 좀처럼 2시간10분 안에 진입하지 못했고 발바닥 부상도 생겼지만 특유의 성실성으로 하루 30km에 달하는 거리 훈련을 피하는 법이 없었다. 2000년대 이후 참담한 실패를 맛봐야 했던 한국 마라톤의 현실도 그에게 오기를 발동케 했다.

이날까지 생애 37번째 풀코스 도전에 35번째 완주. 37세의 나이에 2시간8분대 기록을 세운 것도 세계 마라톤계를 놀라게 할만한 일이다. 40대까지 선수 생활을 하는 경우도 더러 있지만 세계적으로 서른 번 이상 풀코스를 완주하며 끊임없이 정상급 기록을 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이봉주는 다음 레이스를 준비하고 있다. 오인환 삼성전자 마라톤 감독은 "나이가 있으니 충분히 휴식을 취하게 한 다음 가을 레이스를 준비해야 겠다"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