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경기자들과 6시간 솔직토크

벤처(Venture).영어사전을 펼쳐 보면 첫머리에 '모험'이라고 해석돼 있다.

흔히 기업인들의 삶을 모험가에 빗대곤 한다.

'흥'과 '망' 사이에서 끊임없이 줄타기 하는 그들을 가리켜 "모험 유전자를 타고 났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아예 '모험'이라는 말을 앞에 못박은 벤처기업인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그것도 우리나라 벤처 1세대,그 중에서도 '맏형'으로 불리는 사람이라면.카우보이 모자를 눌러 쓰고 채찍을 한 손에 든 인디애나 존스까지는 아니더라도 외모에서부터 범상치 않은 모험가의 이미지가 풍기지 않을까.

지난달 28일 밤 서울 중림동에 있는 한 고깃집에서 한국경제신문 과학벤처중기부 기자들이 만난 변대규 휴맥스 사장(47)의 첫인상은 방학 때도 오후 12시까지 실험실에서 연구에 몰두하는 대학교수 이미지의 전형이었다.

마른 체형에 갸름한 얼굴,다소 소심해 보이는 눈빛과 도수 높은 안경이 어우러진 그의 모습에서 '벤처'를 읽어내기는 힘들었다.

그 역시 "나이 40이 넘었는데도 장사꾼 얼굴이 안 나와 걱정"이라며 웃었다.

변 사장은 그러나 기자들과 술잔을 부딪치자 곧 숨겨뒀던 자신의 모험가적 카리스마를 드러냈다.

어눌한 듯하면서도 무게감 있는 그의 말주변을 통해 펼쳐진 '모험담'은 한국 벤처의 역사를 그대로 풀어 놓은 듯했다.

이날 술자리는 근처 맥주집으로 옮겨져 오후 12시까지 장장 6시간에 걸쳐 이어졌다.

자리를 파한 후 변 사장과 마찬가지로 집이 분당인 기자들은 그의 차안에서까지 못다한 나머지 이야기를 나눴다.



-(홍일점 이상은 기자가 그를 만나자마자 대뜸 이야기를 꺼냈다)미남이시네요.

"(작은 눈이 동그래지며)네? 당황스럽네요,허허.다른 중소기업 사장들 잘생긴 분들이 많을 텐데.내가 고생을 덜한 건가?"

-주량은 어느 정도인가요.

"보통 언론에 주량을 말할 때는 아무리 술을 잘 마셔도 소주 1병이라고 한다면서요? 전에 한 언론에 소주 2병이라고 밝혔다 주위에서 그렇게 잘 먹느냐고 말들이 많았어요.

소주 반병이라고 해두죠."

-그래도 진짜 주량이 있을 텐데.

"소주보다는 폭탄주를 잘 마셔요.

5부 폭탄주는 20잔까지도 마시곤 했는데."

-대단하네요.

특별히 좋아하는 주종이라도.

"에이,솔직히 술맛도 몰라요.

근데 와인은 잘 안 당겨요.

보통 술 좀 마시는 사람들끼리 좀 줄이자며 와인 마시자고 하잖아요. 그리고선 한 석 잔 정도 마시고 아 이거 술 먹은 것 같지도 않네 하며 소주시키곤 하잖습니까."

-초·중·고교 시절 내내 우등생이었다는데. 성적 한번 공개해 보시죠,IQ도요.

"성적이야 전교 수석할 때도 있고 2~3등 할 때도 있고 그랬죠,뭐.IQ는 창피하게 무슨.EQ라면 또 모를까. 이러지 말고 술이나 좀 더 마셔요."(변 사장은 이때부터 맥주를 주문한 뒤 소주와 섞은 '소주폭탄주'를 제조해 돌리기 시작했다)

-보통 공부 잘하는 사람들이 진학하는 의대가 아니라 공대를 택한 이유라도 있나요.

전공도 하필 제어계측공학인데.

"고교 때 문과를 갈지 이과를 갈지 고민을 많이 했어요.

문과 기질도 다분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일단 이과를 선택하자 당연히 공대를 가야겠다고 마음먹었죠.우리 때만 해도 공대가 굉장히 매력적이었으니까.

그리고 사실 제어계측공학이라는 전공에 대해서는 잘 몰랐어요.

다만 로보틱스랑 미사일 제어를 연구한다고 하니까 멋져 보이기도 하고."

-대학 때도 공부 잘했나요.

"대학 4년 동안 공부는 거의 안했어요.

당시에는 대학생이 공부할 여건이 아니었어요. 만날 휴교령에다 공부하는 게 이상한 사회적 환경이었으니까.

(변 사장은 79학번으로 유신정권 시절 입학생이다)평점이 3.1~3.2 정도 였을 걸요."

-데모도 했었나요.

"그거 있잖아요. 뒤에서 따라다니곤 하던 거."

-대학 시절 여학생들한테 인기가 꽤나 있었을 듯한데.연애결혼 했나요.

"우리 과에 여자가 3~4명밖에 없었어요.

당시 공대들이 다 그랬지요.

주로 다른 학교 여학생들이랑 미팅하면서 어울렸어요.

아내는 창업을 한 뒤 연구실 선배의 소개로 만났어요. 1년 사귀고 바로 결혼에 골인했지요."

-첫눈에 필이 꽂혔나요.

"아니 뭐 그런 것은 아니고….(이때 주위에서 '그렇다고 이야기 하셔야죠' 하고 압력을 넣었다) 내가 생긴 꼬라지가 첫눈에 반할 그런 스타일이 아니잖아요."

-연애할 때 재밌던 얘기 좀 들려 주시지요.

"재미요? 그런 거 없어요. 서른 살에 장가갔는데 그런 게 있기나 했겠어요."

-머리 좋은 이공계 졸업생들은 보통 박사학위를 받아 대학에서 교수로 자리잡던데.

"내가 일단 뭘 하면 잘해야 한다는 욕심이 있어요.

근데 박사과정을 밟으면서 내가 뛰어난 교수가 될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수학도 잘 못하고….그래서 박사과정 1년 때 포기했지요."

-술김에 창업을 결심했다던데.

"1989년이었을 거예요.

대학원생 친구들과 서울 신림동에 있는 단골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면서 서로 장래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다같이 창업을 해보자고 장난처럼 의견을 모았지요.

사업계획이니 하는 것은 물론 아무것도 없었고.그게 휴맥스 탄생의 출발이었습니다."

-창업 자금은 있었나요.

"기술신용보증기금에서 돈을 빌렸는데,한마디로 '무대뽀'로 덤볐지요.

보증기금에 5000만원짜리 보증서를 신청하러 갔더니 창구 직원이 대뜸 집 등기부등본을 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저 하숙생인데요'라고 했더니 직원이 황당한 표정으로 '하숙생이 보증 받으러 온 것은 처음 본다'고 말하더니 옆의 직원들과 낄낄거리며 웃더군요.

어쨌든 보증서를 받아냈어요.

아마 박사학위를 보고 그랬는지."(기보는 최근 변 사장에 대한 대출을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꼽고 있다)

-그런 무모함을 보면 사업에서 시행착오도 많았을 것 같은데.

"당연히 처음 5년 동안 실패를 되풀이했지요.

해마다 1~2개 사업 아이템을 개발하다 접었으니까.

휴맥스는 당시 교과서적 실패,다시 말해 공급자 중심 사고로 일관하다 실패를 거듭했어요.

시장이 요구하는 것은 놔두고 우리가 관심있는 것만 만들었으니.실패하는 벤처들이 다 그래요."

-첫 성공작이 가요반주기였다는데.

"이것도 처음에 다른 기술을 개발하다 나온 거예요.

컴퓨터용 영상처리 보드를 만들었는데 출시 후 광고에 제품의 여러 가지 용도를 적시한 가운데 아마 8번째인가 마지막에 '영상 위에 자막을 올릴 수 있다'는 문구를 넣었어요.

시장의 생리를 모르는 엔지니어 입장에서는 이 기능이 별로 안 중요하다고 여긴 것이지요.

그런데 고객들은 이 문구를 본 거예요.

'이게 시장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아예 노래방 영상에 자막이 나오는 가요반주기를 개발하기로 했죠."

-잘 되던 가요반주기 사업을 포기하고 디지털 셋톱박스로 사업 방향을 틀었는데.

"사실 디지털 셋톱박스 사업에 나서기로 한 것은 중요한 결정이 아니었어요.

진짜 중요한 결정은 디지털 가전 사업에 뛰어들기로 한 것입니다.

당시만 해도 아날로그 가전이 대세였거든요.

디지털 가전 사업에 나서기로 한 이상 연구개발은 자연히 디지털 셋톱박스 개발로 흘러가게 돼 있죠.그런데 디지털 셋톱박스 사업을 하면서 가요반주기 사업도 함께 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는 판단이 들었어요.

그래서 과감하게 포기했습니다.

사실 지금 생각하면 극단적인 결정인데 당시에는 그만큼 때가 묻지 않았던 거죠.현실도 몰랐고요."

-그 사업을 시작하며 죽을 고생을 했다던데.

"처음에는 잘 나갔지요.

당시 국내에는 수요가 없어 유럽 시장을 노렸는데 1996년 처음 수출에 성공했죠.3개월 만에 수출액이 3000만달러에 달했어요.

'대박이다' 싶었는데 이게 웬걸,다음해에 절반이 반품돼 들어온 거예요.

1년 내내 고장난 제품 고치러 돌아다니느라 시간 다 보냈어요.

그 사이 제품 판매는 거의 중단하다시피 했지요."

-뛰어난 엔지니어들이 모여서 만든 제품이 그랬다니 의외네요.

"벤처기업의 착각 중 하나가 '자본은 없어도 기술력은 뛰어나다'는 거예요.

우리도 예외가 아니었고.실상은 기술력도 모자랐던 거지요.

날씨가 조금만 안 좋아도 수신이 안 되니 누군들 좋아하겠어요."

-힘들었겠네요.

"1997년 영국 공장 근처 숙소에서 새벽 3시에 일어나 혼자 우리 회사 상황을 점검해 봤어요.

그랬더니 완전히 '망한' 회사더라고요.

현금은 없고 주가는 폭락하고 직원들 사기는 죽어 있고….여기에 매출까지 없는 상태였으니.한국에 돌아와 궁여지책으로 당장 저를 비롯해 모든 직원들의 월급을 깎았어요.

설상가상으로 주요 거래처인 해태전자마저 부도가 났어요.

당시 우리 회사 재무 담당 이사를 맡았던 사람은 '끝인데요.

사업을 정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라는 얘기를 하더군요."

-그런 상황에서도 망하지는 않았네요.

"반품이 들어온 제품들을 수리하면서 단점을 보완한 신제품을 개발해 1997년 말에 내놨어요.

그런데 이 제품이 히트를 쳤어요.

아마 몇 달만 늦게 나왔어도 망했을 텐데.품질이 안정되면서 고객이 갈수록 늘어났지요.

이후 꾸준히 신제품을 내놓으면서 차츰 업계를 선도하는 업체로 부상한 거죠."

-지난해 6600억원의 매출을 올렸는데 올해 1조원 클럽 가입이 가능한가요.

"올해 1분기는 성적이 좋아요.

그런데 1조원은 좀 부담스러워요.

요즘은 업계가 워낙 빨리 돌아가니까 1년은커녕 3개월을 예측하기도 힘들고.삼성전자 정도나 돼야 정확한 예측이 가능할 거예요."

-2004년 디지털TV 해외 판매를 시작하셨는데요,국내 시장에서 삼성전자 LG전자와 한판 겨뤄 볼 생각은 없는지요.

"아직 역량이 부족해요.

삼성 LG와 안 붙으려고 도망 다니고 있습니다.

(언뜻 농담 같은 이 대목에서 그는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휴맥스는 삼성 LG와 바로 붙어서 이길 수 있는 회사가 아닙니다.

힘을 기르는 데는 시간이 필요해요.

기분으로 맞붙을 수는 없는 거죠.작년에도 내수 시장에 내놓을까 하다 포기했어요.

올해 말이나 내년께로 생각은 하고 있는데 힘들다 싶으면 또 포기하겠죠."

-지난해 창사 17년 만에 처음 신입 사원을 뽑았는데.

"그 전까지 경력자를 수시 채용했어요.

당장 필드에서 써먹을 수 있는 인재가 필요하니까.

그런데 경력 직원들은 전문성은 높지만 출신 배경이 다르다 보니 소속감이나 공동체 의식은 다소 떨어져요.

물렁물렁해진 조직을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서죠."

-받아 보니 어떤가요.

"20대 중반 젊은이들의 사고 방식을 이해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죠.그래서 신입 사원들에게 직접 물어봤어요.

10년 뒤에 뭘 할지.다들 대답은 비슷하더라고요.

첫째,전문가가 되겠다고 하더군요.

휴맥스를 위해 열심히 일하겠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어요.

둘째,건강을 위해 열심히 운동하겠다, 셋째,재테크를 하겠다.

우리 때랑은 완전 다르죠.아니 20대 중반에 무슨 건강이야.재테크는 또 뭐고."

-서울 사람들이 이른바 '촌동네'로 부르는 경남 거창이 고향이던데 혹시 이곳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버신 거 아닌가요.

(변 사장은 윤진식 한국경제신문 과학벤처중기 부장과 동향이다)

"최근에 영화 '1번가의 기적'을 봤는데 거기 나오는 시골뜨기 철거촌 아이가 사투리를 팍팍 쓰며 거창이 고향이라 해 반갑던데요.

거창이 큰 곳이 아니니 가장 돈을 많이 번 사람일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한데요."

-정치권의 영입 1순위로 꼽히던데.혹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할 의향이라도.

"아니 사업도 바쁜데 무슨 출마예요.

사실 콜은 많이 받았는데 저는 정치랑은 안 맞는 사람이에요.

사업은 어떻든 합리적이지 않으면 실패합니다.

그런데 정치는 합리적인 대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닌 거 같아요."

-벤처 1세대로 벤처기업협회를 이끌어 달라는 부탁도 많을 텐데.

"벤처기업협회는 특별한 협회예요.

협회란 원래 다 회원 이익을 위해서 움직이는데 벤처기업협회는 정부 정책과 사회 전체를 위해 움직이는 단체죠.그러다 보니 회장이 너무 바빠요.

기업인으로서는 거의 사업을 그만두는 결심이 필요하죠.그래서 안 한 거예요.

둘 다 할 수는 없으니까."

-대기업인 SK텔레콤 사외이사로 활동하며 명쾌한 해답을 많이 내놨다는 평가던데.

"기자들이 뭐 이리 아는 게 많아?(웃음) 명쾌는 무슨….말이 나와서 하는 이야긴데 SK 이사회는 대기업 이사회 가운데 가장 발전했다는 생각이에요.

최태원 회장이 이사회 중심으로 가겠다고 하셨는데 진심인 것 같고요.

이렇게 말하니까 회사 자랑해 주는 것 같아 이상하네요.

다만 우리 사회가 이사회 중심 경영이 뿌리 내릴 만큼의 조건을 갖추지는 못한 것 같아요.

인재 풀도 부족하고."

-인생에 점수를 준다면.

"점수는 얘기하기 힘든데.전 그냥 교과서처럼 열심히 살려고 애써요.

적당히가 아니라 책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열심히 사는 것."

-다시 태어나도 사업가의 길을 걸을 것인가요.

"그러고 싶어요.

전 굉장히 만족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것을 알게 됐거든요.

만약 교수가 됐다면 깊게는 갔겠지만 좁았을 것 같아요.

지금이 훨씬 더 좋아요."

-공대 후배들이 창업과 취직,학문의 길 사이에서 고민한다면.

"공부할 놈 있고 기업 갈 놈 있고 그런 것 아닌가요? 그런데 뭔가 저질러 봐라 이렇게는 이야기하고 싶어요.

제발 안정적인 일을 하려고 하지 마라.괴롭고 힘들어도 그걸 넘어가야 인생이 넓어지는 것이니까.

건물 하나 사 가지고 임대료 받고 사는 인생은 너무 지루하지 않으냐 하는 말이죠."

정리=임도원 기자 van7691@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