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孝鍾 < 서울대 교수·정치학 >

요즈음 우리 정치가 돌아가는 것을 보면 이상한 것이 한둘이 아니다. '백년정당'이라고 자부했던 정당이 갑자기 '침몰하는 타이타닉호'처럼 돼 원내 제2당으로 전락했다. 청와대는 이번 특별사면이 '경제살리기'를 위한 경제사면이라고 강변하는데도,정치인 사면이 눈에 띈다. 또 임기가 1년 남은 정부가 하루가 멀다하고 10년 계획들을 야심차게 쏟아내니,마치 새로운 정부가 들어선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인가. 그것은 정치가 있어야 할 자리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정치가 비정상적인 상황에서는 '토론 공화국'답게 아무리 치열한 정책논쟁을 벌여도 허사다. 그동안 진보와 보수는 "성장이냐 분배냐" "큰 정부냐 작은 정부냐" 하는 문제로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또 "시장이냐 복지냐" 하는 문제로 정책 싸움도 했다. 하지만 정치가 정상적이지 않은데 그런 논쟁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대선(大選)의 해'인 만큼 정치에 민감한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물론 누가 최후의 승자가 될까 하는 문제가 최고의 관심사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일까. 결코 그렇지 않으며,또 그래서도 안된다. 정치에서 이기고 지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승패가 정치의 모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숨쉬기가 인생의 목표고 스코어가 테니스경기의 목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과연 있는가. 숨쉬는 것이 중요하고 경기에서 스코어가 중요한 것이 사실이지만,그것이 삶의 최종 목표나 경기의 궁극적 목표가 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정치인들이라면 대선에서 이기는 것이 중요하지만,그렇다고 해서 대선 승리가 정치인들의 최종목표가 될 수는 없다.

우리 정치인들이 잊고 산 것이 있지 않았을까. 국화빵에 국화 없고 붕어빵에 붕어 없듯이,한국정치에 '바를 정(正)자' 정치가 빠져 있었다는 사실 말이다. '바를 정자'의 의미는 정치의 '품격'에 관한 것일 터이다. 유감스럽게도 한국정치에서 워낙 '전략적 사고'와 '정략적 행보'가 판을 치다 보니,'공공의 이익'이나 '공동선'과 같은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풍조가 만연하고 정치의 목표에 대해 고민하는 법을 아예 잃어 버렸다. 그러다 보니 대선 승리가 최고선처럼 돼버린 것이다. 하지만 차기 대통령은 선거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비전과 리더십을 가진 존재로 평가받는 것이 아니라 비전과 리더십을 가졌기 때문에 승리했다는 평가를 받아야 한다.

새로운 이념과 가치관 하면,참여정부를 따라갈 정부가 없다. 참여정부는 진보의 이상과 이념이 담긴 수많은 개혁의제들을 선점하고 새로운 개념들을 쏟아냈다. '토론공화국' '자주' '포용' '협치' '혁신' '화해' '균형발전' 등,참신한 느낌을 주는 신조어(新造語)들이 그 과정에서 무수히 만들어졌다. 그러나 막상 그것들을 역동적으로 추진하겠다는 참여정부에는 '품격'이 부족했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진보성향의 '참 좋은 말'들의 뜻이 바래지고 미사여구(美辭麗句)로만 남게 됐다. 이제 우리는 대한민국을 '정의로운 나라'나 '평등한 나라'로 만들고자 하는 이념형 아젠다를 버리고 '품격이 있는 나라'로 만드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 평등이니 균형이니 정의니 하는 이념적 지향들이 고귀하다고 해도 '정치의 품격'이 없으면 '깨진 항아리에 물을 붓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사회는 권력이 독선과 아집을 부릴 수 있는 '비열한 직업'이라기보다는 아량과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구현할 수 있는 '고귀한 직업'이라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줄 사람을 원한다. 또 대통령직이란 자신을 지지한 국민은 물론 자신을 지지하지 않은 국민을 위해서도 봉사하기 위해 불린 '천직'이라는 점을 끈질기게 보여줄 결의를 다질 사람이 필요하다. 또 복지사회를 만들고 완벽하게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통치자의 우선적 소임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기보다는 국정이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품위있는 행위라는 것을 입증할 사람이 요청된다. 제발 이런 자질을 가진 사람들이 복마전(伏魔殿) 같은 정치판에서도 끝까지 살아남았으면 하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