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퇴임사를 쓰시려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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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奎載 < 논설위원ㆍ경제교육연구소장 jkj@hankyung.com>
"이제는 돌아가련다 / 논밭이 비어 있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으리 / 내 마음 이제껏 육신의 노예였으니 / ~(중략) 배는 가벼이 흔들리고/바람은 옷자락을 붙드네…."
도연명의 나이 41세. 중국 진나라 팽택현의 지사 자리를 물러나면서 지은 저 유명한 귀거래사다. 이후 1600년 동안 수도 없이 되풀이된 퇴임사들의 원형이다. 그러나 자리를 물러나는 변들이 모두 이렇게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다. 세속에 미련이 남고 재직 기간의 일로 악연만 쌓았다면 외려 독설과 변명으로 일관하고 마는 것이 퇴임사다. 그래서 때로는 언어 공해요 또 하나의 기만으로 전락할 뿐이다.
역사상 가장 짧은 퇴임사로는 "대통령 직무를 중단한다. 오늘 정오부터"라고 했던 프랑스 드골 대통령의 퇴임사가 있다. 국민 여론의 조변석개를 탓하는 복잡한 심사를 표현하기에는 차라리 말을 끊는 것도 한 방법이었을까. 직위 해제에 대한 반발과 대통령에 대한 원망조차 촌철살인의 경구로 승화시킨 것은 "노병은 죽지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라는 맥아더의 퇴임연설이다. 군인다운 솔직함이 온전히 드러났던 케이스.
바야흐로 퇴임사들이 홍수처럼 쏟아지는 인사철이요 정치의 계절이다. 열린우리당을 탈당하는 사람들의 집단 퇴임사는 어리둥절의 표본이라 할 만하지만 국회의원을 그만두거나 장·차관을 물러나면서 저마다 한껏 멋을 부린 퇴임의 변을 발표하는 것도 요즘의 유행이다. 자신도 잘 알지 못하는 한문 구절을 턱하니 머리말로 내놓는 사자성어 퇴임사는 이 무슨 시대착오냐는 핀잔을 들을 만도 하지만 애용되기로 따지면 으뜸이다. 논문 표절 문제로 물러났던 김병준 교육부총리는 "타면자건(唾面自乾):얼굴에 튄 침이 스스로 마를 때까지"라는 말을 했지만 어려운 한문 탓인지 누가 무엇을 잘못했다는 것인지 납득키 어렵다.
정동영 의장은 "벼랑 끝에서 손을 놓는다"고 하면 될 것을 굳이 "縣崖撤手丈夫兒(현애살수장부아)"라고 했고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는 "눈밭에 함부로 길을 내지 말라"는 서산대사의 선시를 낭독하였으니 자신의 퇴임을 선인에 비겨 과대포장해보려는 노력들이 애처롭다. "내가 떠나면 나라가 조용해질 것"이라고 했다는 모 청와대 홍보수석의 퇴임사도 가관이기는 마찬가지다. 자신을 국가적 인물로 착각하는 것도 자유라면 자유다. 다만 그런 정신의 미숙아들로 권부를 채웠던 것이 참여정부의 가장 큰 잘못일 것이고….
재계와 크고작은 갈등을 일으켰던 강철규 공정위원장은 물러나는 순간까지 "반시장적인 것이 시장적인 것을 매도하고 있다"며 도발적인 공세를 취했고 박승 한은 총재는 "양극화는 실패가 아니라 성공의 증좌"라는 교수풍 강의로 퇴임사를 마무리했다. 정덕구 열린우리당 의원과 박병원 재경차관의 최근 퇴임사도 읽어볼 만하다. 정 의원은 열린당과 노무현 대통령의 이념 정체성에 대해서 그동안은 까막눈이었다는 것을 자백하는 꼴이어서 실로 민망하기 짝이 없다. 더구나 참여정부의 허다한 반시장적 입법들에 대한 알리바이조차 없어 여간 당혹스럽지 않다. 박 차관의 짧은 퇴임사는 그에 대한 세평이 빈말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할 만큼 촌철의 맛이 있다. 정부내에서 가장 시장주의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그는 어울리지 않게도 자화자찬의 말을 늘어놓아 읽는 사람을 일단 의아하게 만든다. 그러나 짧은 단어들 속에 참여정부의 좌편향성을 비판하는 교묘한 이중언어들을 심어놓고 있어 속내를 아는 사람들로 하여금 고소를 금치 못하게 만들고 있다.
올 봄에도 수많은 퇴임사들이 쏟아질 것이다. 그러나 허다한 퇴임사가 결코 도연명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 단순히 문장의 모자람 때문만은 아니다. 퇴임사를 심지어 사이비 출사표와 혼동하는 기회주의자들조차 많은 까닭에 언어의 세계만 갈수록 혼탁해질 뿐이다. 어찌 퇴임사만의 문제일까마는 절제된 언어로 읽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그런 퇴임의 말들이 기다려진다. 전도된 언어의 썩은 냄새들이 진동하기에 더욱 그렇다.
도연명의 귀거래사는 이렇게 마무리되고 있다. "세상 만물은 좋은 시절을 즐기는데/내 인생은 이제 마지막에 이르고 있으니…."
"이제는 돌아가련다 / 논밭이 비어 있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으리 / 내 마음 이제껏 육신의 노예였으니 / ~(중략) 배는 가벼이 흔들리고/바람은 옷자락을 붙드네…."
도연명의 나이 41세. 중국 진나라 팽택현의 지사 자리를 물러나면서 지은 저 유명한 귀거래사다. 이후 1600년 동안 수도 없이 되풀이된 퇴임사들의 원형이다. 그러나 자리를 물러나는 변들이 모두 이렇게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다. 세속에 미련이 남고 재직 기간의 일로 악연만 쌓았다면 외려 독설과 변명으로 일관하고 마는 것이 퇴임사다. 그래서 때로는 언어 공해요 또 하나의 기만으로 전락할 뿐이다.
역사상 가장 짧은 퇴임사로는 "대통령 직무를 중단한다. 오늘 정오부터"라고 했던 프랑스 드골 대통령의 퇴임사가 있다. 국민 여론의 조변석개를 탓하는 복잡한 심사를 표현하기에는 차라리 말을 끊는 것도 한 방법이었을까. 직위 해제에 대한 반발과 대통령에 대한 원망조차 촌철살인의 경구로 승화시킨 것은 "노병은 죽지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라는 맥아더의 퇴임연설이다. 군인다운 솔직함이 온전히 드러났던 케이스.
바야흐로 퇴임사들이 홍수처럼 쏟아지는 인사철이요 정치의 계절이다. 열린우리당을 탈당하는 사람들의 집단 퇴임사는 어리둥절의 표본이라 할 만하지만 국회의원을 그만두거나 장·차관을 물러나면서 저마다 한껏 멋을 부린 퇴임의 변을 발표하는 것도 요즘의 유행이다. 자신도 잘 알지 못하는 한문 구절을 턱하니 머리말로 내놓는 사자성어 퇴임사는 이 무슨 시대착오냐는 핀잔을 들을 만도 하지만 애용되기로 따지면 으뜸이다. 논문 표절 문제로 물러났던 김병준 교육부총리는 "타면자건(唾面自乾):얼굴에 튄 침이 스스로 마를 때까지"라는 말을 했지만 어려운 한문 탓인지 누가 무엇을 잘못했다는 것인지 납득키 어렵다.
정동영 의장은 "벼랑 끝에서 손을 놓는다"고 하면 될 것을 굳이 "縣崖撤手丈夫兒(현애살수장부아)"라고 했고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는 "눈밭에 함부로 길을 내지 말라"는 서산대사의 선시를 낭독하였으니 자신의 퇴임을 선인에 비겨 과대포장해보려는 노력들이 애처롭다. "내가 떠나면 나라가 조용해질 것"이라고 했다는 모 청와대 홍보수석의 퇴임사도 가관이기는 마찬가지다. 자신을 국가적 인물로 착각하는 것도 자유라면 자유다. 다만 그런 정신의 미숙아들로 권부를 채웠던 것이 참여정부의 가장 큰 잘못일 것이고….
재계와 크고작은 갈등을 일으켰던 강철규 공정위원장은 물러나는 순간까지 "반시장적인 것이 시장적인 것을 매도하고 있다"며 도발적인 공세를 취했고 박승 한은 총재는 "양극화는 실패가 아니라 성공의 증좌"라는 교수풍 강의로 퇴임사를 마무리했다. 정덕구 열린우리당 의원과 박병원 재경차관의 최근 퇴임사도 읽어볼 만하다. 정 의원은 열린당과 노무현 대통령의 이념 정체성에 대해서 그동안은 까막눈이었다는 것을 자백하는 꼴이어서 실로 민망하기 짝이 없다. 더구나 참여정부의 허다한 반시장적 입법들에 대한 알리바이조차 없어 여간 당혹스럽지 않다. 박 차관의 짧은 퇴임사는 그에 대한 세평이 빈말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할 만큼 촌철의 맛이 있다. 정부내에서 가장 시장주의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그는 어울리지 않게도 자화자찬의 말을 늘어놓아 읽는 사람을 일단 의아하게 만든다. 그러나 짧은 단어들 속에 참여정부의 좌편향성을 비판하는 교묘한 이중언어들을 심어놓고 있어 속내를 아는 사람들로 하여금 고소를 금치 못하게 만들고 있다.
올 봄에도 수많은 퇴임사들이 쏟아질 것이다. 그러나 허다한 퇴임사가 결코 도연명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 단순히 문장의 모자람 때문만은 아니다. 퇴임사를 심지어 사이비 출사표와 혼동하는 기회주의자들조차 많은 까닭에 언어의 세계만 갈수록 혼탁해질 뿐이다. 어찌 퇴임사만의 문제일까마는 절제된 언어로 읽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그런 퇴임의 말들이 기다려진다. 전도된 언어의 썩은 냄새들이 진동하기에 더욱 그렇다.
도연명의 귀거래사는 이렇게 마무리되고 있다. "세상 만물은 좋은 시절을 즐기는데/내 인생은 이제 마지막에 이르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