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은일 < 소설가 >

얼마 전 눈발 송이송이 날리던 자정 무렵,아파트단지 앞 가게에 다녀오던 참이었다. 가게에서 주인하고 모처럼 내리는 눈에 대해 수다 떨며 십 분쯤 지체했던가. 나갈 때는 고요했던 단지 내 차로에 차량 몇 대가 얽혀 시끄러웠다. 들리는 기색으로 보아하니 싸움이 난 것 같았다. 오호라,접촉 사고가 났군? 구경 중에 싸움 구경이 최고라고,나와 같은 구경꾼이 벌써 여럿이었다. 그런데 차량 접촉사고가 아니었다. 한 여자가 길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짧은 치마에 긴 부츠를 신고 가죽 재킷을 입은 여자는 그냥 뒹구는 게 아니라 한 남자한테 끌려가지 않으려 길바닥에 한사코 몸을 박은 형국이었다. 여자를 끌고가려다 여의치 않아 화가 났던가. 여자를 마구 패면서 짓밟고 있는 남자는 여자의 아버지 같았다. 이미 깊은 밤,아버지가 딸자식의 밤 외출을 막으려다 안되니 화가 나서 폭력을 휘두른다? 폭력이 상습화 된 집안 풍경이 밖에 노출 된 게 틀림없었다. 찰나 간에 내 나름 파악한 정황이 그랬다.

구경이고 뭐고 저러다 여자가 맞아죽겠다 싶었다. 뛰어들어 말릴 용기는 없고 112에 신고라도 해야겠는데 야심한 시각,구멍가게 나가는 길에 전화기를 지녔을 리 만무. 내 옆에서 나처럼 벌벌 떨고 있는 여자 구경꾼한테 "전화기 있으면 신고 좀 하라"고 속삭였다. 그이가,벌써 했다고 자기 말고도 몇 사람이 신고하는 것 같다고 했다. 경찰서가 3분쯤의 거리에 있었다. 그쯤 벌써 경찰들이 나와야 할 것 같은데 경찰은 오지 않고 길바닥의 여자는 자신을 짓밟는 남자 다리를 붙들고 같은 말만 부르짖었다. "제발,제발 이러지 마요. 집으로 가요." 그 여자가 고개를 들었을 때 알았다. 여자는 남자의 딸이 아니라 아내였다. 여자는 남편한테 제발 때리지 말라고,때리더라도 구경꾼이 없는 집에 가서 때리라고 애원하고 있는 것이었다.

저런 멍청이!여자한테 말하고 싶었다. 너는 손이 없냐,발이 없냐. 달아나기라도 할 것이지 왜 맞고만 있냐. 주먹질이 안되면 물어뜯기라도 해라. 남자한테도 소리치고 싶었다. 인간아,말로 할 것이지 왜 패냐,패길. 사내인 게 무슨 벼슬이라고,한밤중에 사람들 앞에서 창피하지도 않냐. 그렇게 바락바락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언제나 분기에 비해 용기가 턱없이 약한 나는 간신히 "제발 누가 좀 말려요" 했다. 나의 그 작은 목소리에 제 여편네를 샌드백 두들기듯 패고 있던 남자가 휙 돌아보았다. 그리곤 버럭 "남 일에 끼어들지 마슈"하며 으름장을 놓았다. 남 일,더구나 남의 부부 일! 나는 찍소리도 못하고 평정되었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구경꾼들도 그 때문에 구경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구경꾼이 너무 많아진 걸 의식했던가. 남자가 여자를 질질 끌고 근방에 있던 차 안으로 들어갔다. 경찰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고 길거리 상황은 그렇게 종료되었다.

그런데 문제의 부부가 내가 사는 건너 동 앞에서 또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게 아닌가. 남자는 여자를 끌고 집으로 들어가려 하고 여자는 끌려 들어가지 않으려 버티는 참이었다. 들어가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내 눈에도 불 보듯 훤한데 그 여자한테는 오죽하겠는가. 달아나라 제발. 달아나다 잡힐지라도 시늉이라도 해라. 먼발치에서 속으로 외대는 구경꾼의 염원이 여자한테 들렸을 리 없지만 달아날 의지 같은 건 애초에 없어 보였다. 군데군데서 창문이 드르륵 열리고 있었다. 남자의 욕지거리와 여자의 울부짖음이 이웃의 창문을 열게 만든 것이었다. 그뿐이었다. 여자는 결국 제 집,지옥 속으로 끌려 들어갔고 나는 내 집으로 들어왔다. 어떤 작은 기척만 들려도 신고하고야 말리라고,전화기 들고 베란다에 나가 한참을 서성이긴 했다. 창문들이 다 닫힌 건너 동에서는 아무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수많은 불빛 중 그들 집이 어딘지 알 수도 없었다. 굵어진 눈발이 마구 쏟아져 모든 소란은 눈에 묻혔다. 나도 내 창을 닫았다.

그 밤 이후 이따금 건너 동을 바라볼 때면 그 밤을 생각하곤 한다. 때때로 한쪽은 패고 한쪽은 맞고 살 그 부부와,폭력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거나 하지 않았던 나와 사람들. 그리고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반복될 그 상황들을. 이웃의 폭력은 이웃의 무관심에서 비롯된다던데 나는 무얼 하고 있는가,행동에 이르지 못하는 반성만 가끔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