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석유화학 업계는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대규모 공장 신증설에 나선 중국과 중동지역 석유화학 업체들이 내년부터 물량을 쏟아내면서 에틸렌 등 핵심 제품의 가격이 곤두박질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이를 타개하기 위한 돌파구는 국내 기업 간 인수·합병(M&A)"(삼성증권 대신증권 등 리서치센터)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덩치를 키워 중국 등의 업체들과 '규모의 경제'로 경쟁을 해야만 생존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현실은 막혀 있다.

정부 때문이다. 유화업체들은 공정거래법에 규정된 독과점 규정에 묶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석유화학 업종의 경우 이미 시장 수급이 세계적인 수준에서 결정되기 때문에 국내 시장만으로 수급 구조를 판단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한국경제신문과 IBM은 국내 시장이 글로벌 시장으로 빠르게 편입되고 있고 경영환경까지 예측 불가능할 정도로 급변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제 정부 주도형 모델은 한계에 달했다는 진단을 내렸다.

한국을 혁신 강국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민간이 혁신 전략을 주도해야 하고 정부는 조력자(facilitator)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는 게 한경과 IBM의 마지막 다섯 번째 제언이다.

◆정부정책으론 세계 변화 못 따라잡아

과거 경제개발기 정부는 산업 발전 방향과 기술 로드맵을 정하고 각종 지원금을 주면서 기업을 사실상 육성했다.

산업 기반시설이 부족했고 민간 자본이 축적되지 않았으며 민간의 경험과 노하우도 부족했던 시절,이런 정책은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됐다.

하지만 지금은 환경이 완전히 변했다.

산업 구조가 복잡해지면서 전 세계 산업 흐름이 정부의 예측을 빗나가고 첨단 기술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진화하는 경우가 훨씬 많아졌다.

물론 기업도 기술 발전을 정확히 예측하기 힘들다.

하지만 냉혹한 생존 경쟁에 노출된 기업은 발빠른 변신을 통해 급변하는 환경에 적응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반면 정부는 한번 결정된 정책을 바꾸기 어렵다.

이해 당사자가 많은 데다 정책의 신뢰도 측면에서도 그렇다.

특히 국경과 업종을 뛰어넘는 경쟁과 기술 융합이 펼쳐지고 있는 상황에서 영역 구분이 확실한 정부 부처는 환경 변화에 더디게 대응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세계무역기구(WTO)체제로 정부는 이전처럼 직접적인 보조금 지급은 물론이고 금융회사를 통한 간접 지원도 어렵게 됐다.

또 정책 담당자의 전문성도 부족하고 인터넷TV를 둘러싼 정보통신부와 방송위원회의 갈등에서 보듯 부처 이기주의로 인해 의사결정이 지연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프랑스와 덴마크 정부의 변신

프랑스는 정부가 경제에 적극 개입하는 전통을 가진 대표적 나라였다.

하지만 경기 침체와 실업자 증가로 위기에 처하자 2004년 당시 미테랑 대통령은 프랑스 대표 기업인 생 고뱅 그룹 총수에게 새 산업 정책과 정부의 역할에 대한 연구를 의뢰했다.

이 결과 탄생한 베파 보고서는 정부가 산업정책을 수립하지 말고 민간의 창의성을 최대한 지원하는 역할을 하도록 했다.

이 보고서는 이후 민간의 자율성을 강화하는 쪽으로 정책 변화를 유도했다.

덴마크의 경우 혁신 클러스터 정책(DK21)을 마련했는데 정부는 프로젝트 과정의 진행 감독과 최종적 사업 선정,예산 배분만 관여했고 나머지 사업 기획은 민간 컨설팅 기업이 주도했다.


◆국가정책 결정에 민간참여 확대해야

한경과 IBM은 국가 차원의 혁신 정책이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민간의 참여를 대폭 확대해야 한다고 분석한다.

따라서 대형 정책 사업을 추진할 때 미국 국가혁신구상(NII)과 유사하게 민간 전문가가 광범위하게 참여하는 워크숍을 추진하고 다양한 외부 기관이 참여하는 컨소시엄을 구성할 것을 주문한다.

컨소시엄에는 여러 기관들의 업무를 조정하는 컨설팅 회사,특정 기술이나 현안에 대한 자문 및 평가를 해주는 기술혁신 연구기관,정책 결정 과정에 의견을 낼 수 있는 전문가 집단 등이 참여해야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정부와 민간은 문제 의식을 같이하며 창의적 대안을 내놓을 수 있다.

또 민간 전문가들은 어떤 문제를 다뤄야 할지를 검토하는 '의제 결정' 단계와 정책 실효성을 분석하고 여러 대안을 모색하는 '정책 형성'단계,여러 대안 가운데 최종적인 의사결정을 내리는 '정책 채택'단계에도 광범위하게 참여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배우련 IBM컨설턴트는 "우리나라의 경우 국가 혁신과 관련한 부처 간 협력이 미흡하고 정부 정책이 하향식으로 전달되며 산학연계가 미흡하다는 문제가 있기 때문에 개방형 혁신 시스템을 도입해 이런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남국 기자 n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