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서기'라는 말을 들으면 무엇이 떠오를까? 정치판이 가장 먼저 생각난다면 분명 우리는 '보스정치' 또는 '계파정치'라 불리는 다소 후진적인 정치문화 속에서 살아온 셈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줄서기'가 군대나 회사,관료사회나 교수사회 등 다양한 조직에서의 중요한 처세술로 인식될 수 있다. 그러나 경제적 의미에서 줄서기는 초과수요를 반영한다. 아파트 분양권 추첨에 밤샘 줄서기까지 등장하는 것은 해당 상품에 대한 수요에 공급이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드러내며,과거 동구권에서 생필품을 사기 위해 길게 늘어선 줄서기는 억압된 인플레이션의 표현이었다.

그런데 사실 '줄을 선다'는 것은 자신의 차례를 기다린다는 것이고 그 차례는 먼저 온 순서대로,즉 기다린 시간과 노력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니 줄서기는 가장 기초적인 공중질서 중 하나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줄을 잘 서지 않는가? 그리고 왜 한쪽에 줄을 서면서도 다른 줄을 살피고 눈치를 보게 되는가? 줄을 서지 않는 것이 유리하거나 그쪽에 줄을 서는 것이 불리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간혹 마을버스 같은 것을 기다리다보면,줄서기에 대해 사람들이 행동하는 방식은 이미 형성돼 있는 분위기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다만 몇 명이라도 일렬로 줄을 서 있는 경우에는 잠자코 맨 뒤에 가서 서있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사람 수가 많아도 줄이 있다는 것이 확연히 구분되지 않을 경우에는 은근슬쩍 그 무리에(되도록이면 앞쪽에) 끼어 있다가 버스가 나타난 순간 몸을 날릴 준비를 하게 된다.

이처럼 사람들의 기회주의가 발현될 소지를 차단하는 것은 이미 형성되어 있는 '행동의 룰(규칙)'이다. 그 질서가 마을버스 정류장처럼 자생적으로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제도적으로 형성돼 있는 경우도 많다. 사거리의 신호등 같은 것이 바로 그런 역할을 한다. 한 번쯤 경험했겠지만 신호등이 고장 났을 때 그 혼잡한 상황을 생각해 보라.

그런데 단순히 줄을 선다는 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줄을 어떻게 서는가의 문제도 중요하다. 효율성과 형평성은 경제학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원배분의 두 가지 평가기준인데,줄을 서는 방법에도 이 기준을 적용해볼 수 있을 것이다.

도로의 예를 하나 더 들어서 효율성에 관해 생각해보자. 국도를 달리다보면 두 갈래 길이 하나로 합쳐지는 도로를 만날 수 있다. 그 때 두 길에서 오던 차들은 이쪽에서 한 대,다음에는 저쪽에서 한 대,이런 식으로 번갈아 가며 진입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이런 방식은 공평할지는 몰라도 그다지 효율적이지 않다. 한쪽 길에서 10대가 연속해 들어오고 그 다음에 다른쪽 길에서 10대가 연속해 들어오는 것이 모두 20대의 차량이 진입하는 데 걸리는 총소요시간을 줄인다는 점에서 효율적일 것이다. 이런 길목에서 진입차량이 많은 시간에는 신호등을 운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또한 요즘 거의 정착되고 있는 에스컬레이터의 두 줄 서기 방식,즉 제자리에 있을 사람은 오른쪽에 서고,움직일 사람은 왼쪽으로 걷는 방식 역시 개인의 사정과 선호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규칙 없이 그냥 두 줄로 서는 경우보다 효율적일 것이다.

그런데 줄이 여러 개일 경우에는 줄서기의 형평성이 달성되지 못할 때가 많다. 한쪽에 줄을 서 있으면서도 다른 쪽 줄을 살피게 되는 상황은 줄서기의 룰은 있지만 기회주의가 완전히 극복되지 못한 경우다. 대표적인 예가 공중화장실이나 공중전화부스,또는 대형할인매장 계산대 앞에서의 줄서기다. 분명히 자기가 옆줄에 있는 사람보다 먼저 왔는데 앞에서 '짱돌'을 만난 죄로 한참을 더 기다려야 할 때는 짜증이 나기 쉽다.

이런 경우 좀 더 공평한 룰이 없을까? 어떤 공중화장실에서는 사람들이 줄을 설 때 화장실 입구 바깥에 줄을 선다. 볼일을 마친 사람이 한 명 나오면 맨 앞에 줄을 섰던 사람이 그 사람이 나온 칸으로 들어가게 되니 줄을 선 순서대로 일을 볼 수 있게 된다. 룰이 조금만 잘 만들어지고 지켜지면 합리적으로 공중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 요즘은 은행 뿐 아니라 민원이 많은 관공서에서도 보편화된 번호표 발급 역시 이용고객의 입장에서 보면 합리적인 방식이다. 이처럼 머리를 잘 쓰면 똑같이 줄을 서더라도 효율성과 형평성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김희삼 < KDI 연구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