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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아침에] 24년만에 돌아온 지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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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은주 < 소설가 >

    초등학교 4학년인 큰아이가 이틀 연속으로 돈을 잃어버렸다.

    점심을 먹으러 급식실에 다녀오는 동안 교실에 둔 가방을 누군가 뒤져 지갑 속의 돈을 몽땅 빼갔다는 것이다.

    처음엔 그저 주의를 주고 말았는데 다음날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자 참을 수가 없었다.

    "어제 돈을 잃어버리고서도 어떻게 똑같은 곳에 지갑을 그대로 둘 수가 있니? 급식실 갈 때 주머니에 따로 지갑을 챙겼어야지."

    남편 역시 화가 나서 아이에게 소리를 질렀다.

    "얼마나 허술하게 보였으면 네 지갑을 두 번씩이나 노렸겠어? 평소에 좀 똑똑하게 처신해!"

    그 순간 나는 마치 내가 야단을 맞는 것처럼 느껴져서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점심시간에 교실 문단속을 대체 어떻게 하는 거야? 내일 선생님께 꼭 말씀드려.이틀 동안이나 이런 일을 당했다고…."

    피해자인 아이를 너무 몰아세운 듯해 안타까웠던 것은 불현듯 떠오른 옛기억 때문이었다.

    열다섯 살 무렵,수첩에 비상금으로 넣어두었던 만원 지폐 한 장이 사라진 것을 발견한 나는 다시 종이 한 장을 마치 지폐처럼 그 수첩에 넣어두었다.

    '이 글을 네가 다시 본다면 또 내 돈을 훔쳐갈 생각이었겠지? 그렇게 살지마'라고 메모를 적어서….일견 후련하기도 했지만,학교 책상 속에 비상금을 두었던 내가 바보라는 생각에 한동안 괴로웠다.

    그런데 다음날,큰아이가 선생님께 지난 이틀 동안의 일을 말씀드렸더니 그냥 알았다고만 얘기하시더라는 게 아닌가.

    교실 안의 누군가가 돈을 잃으면 모두 함께 벌을 서기도 했던 추억을 공유한 남편과 나는 당황했다.

    교육 방식이 바뀌었나? 예전보다 돈의 가치가 떨어져서 그런가? 혹시 우리가 촌지를 안 주어서 그런 걸까? 학기말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감안하더라도 찜찜한 일이었다.

    그렇게 방학이 시작되고 며칠 후,나는 발신인 불명의 편지 한 통을 받게 되었다.

    학원에 다녀오던 아이가 우편함에서 뽑아들고 온 편지의 내용은 놀랍게도 이러했다.

    '나는 중3때 너와 같은 반이었던 친구다.

    집이 넉넉지 못하여 용돈을 받아본 적이 없는 나는 어느날 네 책상 속의 만원을 훔쳤었다.

    그리고 고등학교,대학교를 가면서 어느날 주님을 영접하고 네가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어 돌려줄 수 없던 차에 어떻게 네 주소와 연락처를 알게 되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께 먼저 용서를 구하고 네게도 용서를 구한다.

    그리고 20년도 넘은 일에 대한 이자와 함께 네 돈을 돌려주게 되어 너무나 기쁘다.

    그럼 너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참으로 맛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길 바라며 이만 줄인다.

    2006.12.중3때 친구가.'

    편지지 사이에 껴있다 떨어진 만원 지폐 두 장을 주워들고 궁금해하는 아이에게 지난 사연을 말해주었다.

    "그럼 나도 개학하면 지갑에 메모를 써놓을까?"

    "아니,그러지 마.어린 시절에 실수할 수도 있는 걸 내가 너무 큰 죄책감을 심어준 것 같아.중학생인데도 용돈을 받아본 적이 없다고 여기에 써있잖아.너도 혹시 예쁜 지갑을 들고 너무 자랑한 건 아닌지 반성해 봐.선생님께서도 그래서 아마 문제 삼지 않으셨는지 몰라.너도,그 아이도,언젠간 저절로 깨닫게 되리라 믿으셨던 거겠지.참,너 이번 주에도 교회 갈거니?"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에게 나는 그 돈을 쥐어주었다.

    일요일에도 친구들을 만날 수 있다는 즐거움에 재미삼아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아이를 지켜보고만 있던 참이었다.

    종교에 회의적인 내가 앞으로 교회에 나갈 일은 없을 것 같지만 그 돈 만큼은 헌금으로 바쳐져야 마땅할 것 같았다.

    우리집의 새해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아이의 일부터 시작해서 우리 사회의 여러가지 어두운 사건들 때문에 자칫 한없이 부정적이었을 연말연시가 옛친구 덕분에 긍정적인 빛깔로 바뀌었다.

    올 한 해 더욱 열심히 살면서 더 많이 사랑하리라는 상투적 다짐조차 새삼 기꺼이 하게 될 정도로….이름 모를 친구에게 거듭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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