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그리트의 말년 작품인 '순례자'의 구성은 매우 간략하다.

허공에 떠있는 중산모자와 얼굴,그리고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겉옷을 걸친 몸 없는 상반신이 전부다.

이 작품은 마그리트 말년 작품들의 사유방식과 조형방법을 잘 보여주는 대표작 가운데 하나다.

다양한 요소들을 결합해서 단일한 구도를 만들었던 초기의 작품들과는 달리 그의 후기작들은 보다 단순한 요소들만을 가지고 화면을 구성하려는 의도를 보여준다. 후기작들의 단순함과 순수함은 더욱 강한 시각적인 매력을 가지도록 해주었다.

그의 초기 작품에서 나타난 중산모자를 쓴 인물의 얼굴이나 전신이 풍경이나 구름 낀 하늘로 대체되었다면,'순례자'는 얼굴 자체가 다른 것으로 대체되거나 교체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얼굴과 사물들 뒤편의 배경 또한 단순한 배경에 그치지 않는다.

마그리트의 초기 작품들에서의 배경은 인물을 뒷받침하는 배경으로서의 밤하늘이었다면 이 작품에서의 배경은 사물의 배경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대체된 것을 표현하는 또 하나의 실체로 읽을 수도 있다.

상체와 모자 사이에 존재하는 배경은 이 남자를 시공간을 초월한 인물로 읽을 수 있도록 해준다는 점에서 배경 그 자체가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셈이다.

이 작품은 중산모자를 쓴 남자의 연작 가운데서 얼굴이 분명하게 드러난 매우 드문 예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얼굴을 명확하게 표현한 까닭이 실존의 인물을 표현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얼굴을 감추거나 가리는 물체는 없지만 이 얼굴은 특정인물을 표상하기보다는 몰개성적인 캐릭터의 현대인 일반을 가리키고 있다.

얼굴이 상체와 모자 사이에 위치하지 않고 공중에 떠있다는 점 또한 의미심장하다.

이런 식의 배치는 감추어져 있는 것을 표현하려고 했던 초기의 작품들과 달리 대체된 것에 매료된 마그리트의 속내를 읽을 수 있게 한다.

김준기(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