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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산칼럼] 사이비 보수, 얼치기 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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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金炳椽 < 서울대 교수·경제학 >

    영국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대학의 칼리지 입구마다 많게는 수백명에 달하는 이름들이 칼리지 벽면에 새겨져 있다. 그 칼리지 출신의 유명한 학자나 역대 학장들 이름이 아니라 바로 1,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목숨을 잃은 졸업생,재학생들의 명단이다. 한 해에 몇 십명 정도였던 그 당시 입학 정원을 감안한다면 참전(參戰) 가능했던 연령대의 졸업생,재학생 중 적어도 20%를 상회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의미다. 죽어서도 말하는 이들은 영국 엘리트의 자긍심의 원천이자 영국사회를 떠받치는 기둥이다. 바로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다.

    영국 사회를 지탱하는 또 하나의 정신은 '보통사람 오블리주'다. 어떤 조사자료를 보면 영국 성인의 80%가 조사 시점 이전 1개월 동안 자선단체에 기부했거나 자선단체와 관련된 활동을 한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직장이 있는 영국인들은 자선단체에 정기적으로 기부하는 것을 당연한 의무로 간주한다.

    미국도 이와 다르지 않다. 2000년 통계에 따르면 미국인 중 약 78%가 그 해 기부금을 낸 경험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2002년 미국의 기업과 개인이 낸 기부금은 2490억달러로 미국 국내총생산의 2.3%에 달했다고 한다. 여기에 한국을 대입해 본다면 한국 국내총생산의 2.3%는 한국 정부예산의 약 8%에 해당되는 돈이다. 한국 정부가 양극화 해소 혹은 복지지출 명목으로 아무리 세금을 올린다 해도 이만큼 더 걷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한 미국인들은 투자에도 윤리를 의식한다. 즉 사회적 책임을 의식하고 투자하는 사람들이 날이 갈수록 늘고 있다. 고용주와 피고용자 간 관계가 정의롭고 공동체를 고려하며 환경에 대한 책임을 의식하면서 활동하는 기업들의 주식과 채권에만 투자하는 윤리펀드(ethical funds)에 더욱 더 많은 사람들이 가입하고 있다.

    사실 미국과 영국은 앵글로색슨형 자본주의,즉 신자유주의에 기초한 보수적 시장경제의 메카라고 볼 수 있다. 흔히들 작은 정부와 노동시장의 유연성만 '보수'의 축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보수의 경제적인 축은 될지언정 정신적인 축은 될 수 없다. 진정한 보수는 그에 걸맞은 윤리와 그에 부합하는 경제라는 두 발을 필요로 한다. 한 발만 있는 외다리 보수는 사이비 보수다.

    애덤 스미스는 시장경제의 정신적 기초를 마련한 학자다. 개인들의 잘 살고자 하는 욕구를 부당하게 억압하지 않고 내버려두어야 경제가 성장한다고 설파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대부분의 경험적 증거들은 그의 이론이 옳음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경제가 계속 성장하려면 사회통합이 제대로 유지돼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정부가 나서서 사회통합을 유지하려고 하기보다는 개인들이 자발적으로 타인을 동정하고 자기통제와 인애심(仁愛心)의 덕을 갖춰 공동체에 기여할 것을 강조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애덤 스미스가 죽었을 때 그의 유산을 정리한 친구들은 크게 놀랐다고 한다. 대학 교수,귀족 자제의 개인교사,또 국부론 등 대저작(大著作)의 저자로 많은 돈을 벌었을 법한 그가 남긴 유산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알아본즉 애덤 스미스는 남이 모르는 가운데 그의 소득 대부분을 자선사업에 썼다는 것이다. 그의 가르침만큼이나 그의 생애도 진정한 보수주의자로서의 삶이었다.

    보수는 더욱 높은 윤리 수준을 요구한다. 진정한 보수는 작은 정부와 큰 자선(慈善)의 결합으로 이뤄진다. 보수가 주창하는 작은 정부에서 비롯되는 빈 공간을 메우려면 개인이 더 윤리적이 돼야 하기 때문이다. 한편 진보는 더욱 높은 전문성을 필요로 한다. 진보가 믿는 정부 개입이 제대로 이뤄지려면 정부 개입의 의도하지 않은 파급효과까지 제대로 예측할 수 있는 실력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윤리가 없는 '잔인한 보수',실력이 낙후된 '얼치기 진보'만 득세하는 나라의 국민은 불행하고 고달프다. 우리나라 보수의 윤리수준은 얼마나 높은가? 우리나라 진보의 실력은 얼마쯤 되는가? 한번 재어보고 싶은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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