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신당동에 사는 주부 김모씨(63)는 최근 집에서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ㅇㅇ은행인데 고객님의 카드가 오류로 결제되었으니 환급받으세요'라는 ARS(자동응답장치) 메시지였다. '다시 들으려면 0번을,상담직원 연결을 원하시면 9번을 누르세요'란 메시지에 따라 9번을 눌렀다. 'ㅇㅇ은행,카드사업부'라는 친절한 목소리의 여자 안내원이 나왔다.

안내원의 요구에 따라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불러주니 65만원이 오류로 결제됐으니 환급받으려면 가까운 은행 현금자동지급기(CD)에 가서 다시 전화를 달라고 했다. 김씨는 시키는대로 인근 CD기 앞에서 전화를 걸었다.

이어 "환급인증번호 등을 일러줄테니 그대로 따라하라"는 안내에 따라 현금카드를 넣고 불러주는 대로 버튼을 눌러가며 환급 절차를 밟았다.

그러나 이는 결제금을 환급해주는 것이 아니라 실제론 김씨의 계좌에서 사기단의 대포통장(타인 명의로 만든 불법 통장)으로 돈을 송금하는 순서였다. 김씨가 정신을 차린 것은 이미 통장에서 570만원이 빠져나간 뒤였다.

연말을 맞아 이 같은 금융사기가 극성을 부리고 있다. 특히 검찰청 등 공공기관과 금융회사 직원을 사칭해 금융거래 정보를 요구하거나 예금을 인출해 가는 피해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 수법도 자동응답시스템(ARS) 등을 활용하는 등 갈수록 지능화되고 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최근 들어 본점엔 하루 평균 30~50여통의 전화사기 신고가 접수되고 있다"며 "경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인지 올해 말은 예년 말에 비해 2배 이상 많은 사기피해 사례가 접수되고 있다"고 들려줬다.

그는 "사기단은 무작위로 전화를 걸어 주로 금융지식이 부족한 주부나 노인이 응답하면 사기 대상으로 삼는다"고 덧붙였다. 이에 따라 시중은행들은 각 지점에 최근 빈번하게 발생하는 금융사기 유형을 전달하고 고객들의 각별한 주의를 촉구했다.

경기도 구리시에 사는 주부 안모씨는 20일 전화로 신용카드가 연체됐다는 ARS 음성 메시지를 받았다. 안내원과 통화를 위해 9번을 누르자 은행 카드사업부 리스크관리팀 직원이라고 신분을 밝힌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그 남자는 정확한 연체 내역을 알려줄테니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불러달라고 요구했다. "은행에서 전화를 걸었으면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알 것이 아니냐"고 했더니 "담당직원이 자리를 비워 대신 전화를 받았다"는 변명을 둘러댔다. 이를 의심한 최씨는 전화를 끊고 해당 은행에 전화로 문의를 했다. 전화사기라며 조심하라는 게 은행측 답변이었다.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인 한나라당 이종구 의원이 발표한 금융감독원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은행원의 횡령.유용과 사기 및 도난피탈 등의 금융사고를 모두 합칠 경우 최근 5년간 금융사고는 총 2300건,피해액은 1조4000억원에 달한다.

금융사의 연간 영업일수가 250일인 점을 감안하면 최근 5년간 하루 평균 1.84건의 사고가 발생했다는 계산이다. 이로 인한 5년간 피해액(1조4000억원)은 대형은행의 한해 순이익에 해당하는 규모다.

금감원은 "공공기관과 금융회사에선 전화나 ARS를 이용해 주민등록번호나 계좌번호 등 개인정보를 요구하거나 CD기를 통해 돈을 환급해 주지 않는다"며 "이런 전화를 받으면 바로 끊어버리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당부했다.

유병연 기자 yoob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