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 쳐들지 않고 순하게 구부러진

저 길이 희망이다

못나고 허접한 것들 불러 모아

높이 모나게 솟지 않고

낮고 둥글게 어깨 낀

저 산이 희망이다

질풍노도로 우쭐대지 않고

가만가만 땅의 마른 입술 적시는

저 강이 희망이다

다시 솟는 찬란한 광채의 해는 너무 눈 시려

이제 막 잠깬 것들 아래로 뒤로 숨는다

(…)

나 이제 서해로 간다

일출이 아닌 일몰로

따스한 기운 너에게 나누어 주며

느릿느릿 허리 숙여 만나는 산과 바다로

삼보일배 눈물 떨구러 간다

거기 수런거리며 깨어나는 검은머리갈매기

나 거기 숨쉬러 간다

-최영철 '서해에서' 부분



한 해가 저물고 있다. 얼마 남지 않은 날들은 작고 창백하다. 생애의 한 뼘을 또 줄였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끝을 향해 달려간다. 결국 적멸(寂滅)일 것이다. 그 어수선한 여정의 어디에 와 있는지는 누구도 모른다. 세월이든 사람이든 보내고 나면 아쉬움만 남는다. 순하게 펼쳐진 '일몰의 바다' 서해 처럼,한 해 동안 날선 감정 다 눅이자. 회한도 원망도 모두 퍼다 버리자. 비우지 않으면 다시 시작 할 수 없으니까.

이정환 문화부장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