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창 < 정치부 차장 >

최근 전직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던 정치권의 한 중진인사와 점심식사를 할 기회가 있었다. 이 인사는 대통령 임기 동안의 스타일 변화에 대해 의미있는 얘기를 했다. "처음 1년은 싫은 소리를 적극적으로 들으려 하지만,1년반이 지나면 고언에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리고 3년이 지나면 화를 내더라."

임기 초반 입바른 소리에 귀기울이며 잘못된 점을 고치려 하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충언에 귀기울이지 않고 임기말에는 아예 귀를 닫아버린다는 얘기다. 전직 대통령들이 "나는 아니다"라며 동의하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우리 대통령들의 임기말이 한결같이 불행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구석이 없지않다.

실제 70∼90%의 높은 지지율 속에 웃으면서 취임했던 우리 대통령들은 임기말을 우울하게 보내다 굳은 얼굴로 청와대를 떠났다. 심복의 총에 운명을 달리한 박정희 전 대통령까지 거슬러갈 필요도 없이 문민대통령인 YS(김영삼 전 대통령)와 DJ(김대중 전 대통령)만 봐도 그렇다. YS나 DJ 모두 화려하게 출발했으나 퇴장은 쓸쓸했다.

금융실명제와 역사바로세우기,군 하나회 척결 등 굵직굵직한 개혁조치로 국민의 마음을 사며 승승장구했던 YS의 비극은 1996년 12월 노동법의 국회 날치기로 시작됐다. 군사작전하듯 유력 대선주자를 포함한 신한국당 의원 전원을 새벽에 관광버스에 태워 국회로 이동,몇분 만에 법안을 기습처리한 것이다. 바로 뒤에 불어닥칠 후폭풍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지지율은 급락했고 곧이어 터진 비리사건으로 아들이 구속되면서 그토록 경계했던 레임덕은 가속화했다.

YS의 불운을 지켜봤던 만큼 '제2의 YS'는 피하고 싶었던 DJ도 결국 비슷한 길을 걸었다. YS의 유산인 IMF위기를 극복하면서 '준비된 대통령'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던 DJ도 자식이 구속되는 전철을 그대로 밟았다. '자식관리'에 대한 잇단 경고음을 외면한 탓이다. 임기말을 전후에 측근들이 줄줄이 구속되는 것도 빼다 박았다. 두 대통령의 비극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민심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힘세진' 주변관리 실패에 따른 예고된 불행이었던 셈이다.

왜일까. 대통령 단임제의 구조적 한계에서 비롯된 측면이 없지는 않지만 근본적으로는 대통령의 제왕적 지위와 행태에서 기인한 측면이 강하다. 임기 초반 힘이 막강하기에 지기를 죽기보다 싫어하는데 익숙해진 대통령들은 그토록 원치않았던 임기말 레임덕에 직면해 무력감 속에 "믿을 건 측근뿐"이라며 측근들에 기댄 게 아닌가 싶다. 그러다 보니 주변에 인의 장막이 생겼고 민의와는 점점 멀어져 갔다. 어찌보면 측근비리가 터진 것은 필연적이었는지도 모른다.

임기를 1년2개월여 남겨놓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에게도 이미 빨간불이 켜진 상태다. 지지율 10%대는 국민과의 소통채널이 끊겼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예다. 임기내내 끊이지 않는 '코드인사'시비와 주변의 '386 파워'는 측근정치와 맥이 닿아있다. 게다가 "대통령 못해먹겠다"는 푸념차원을 넘어 스스로 임기중 사퇴 가능성을 내비치며 레임덕을 자초하고 있다. 현 정권이 과거 정권의 임기말 불행의 전철을 밟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벌써부터 나오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