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디로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다.

'오즈의 마법사'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연상하며 극장에 들어섰다가는 틀림없이 같은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판의 미로-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는 '반지의 제왕'을 단숨에 제압하는 무게감과 비장미에 가슴을 도려내는 슬픔까지 보탠 매우 독특하고 진중한 판타지 영화다.

판타지 영화를 보면서 이렇게 마음 아파한 적이 있었나 싶다.

주목해야 할 수작이다.

1944년 내전으로 만신창이가 된 스페인. 동화책을 좋아하는 소녀 오필리아는 만삭의 엄마와 함께 군인인 새아버지의 부대 저택으로 이사를 간다.

저택을 둘러싼 신비하고 깊은 숲은 오필리아에게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한다.

그러나 냉혹한 새아버지에게 숲은 그 안에 숨어 있는 반군의 소굴일 뿐이다.

새로운 환경에 잠 못 드는 오필리아의 앞에 곤충의 모양을 한 요정이 나타난다.

오필리아는 요정을 따라 미로로 들어가고 거기서 기괴하고 거대한 요정 판을 만난다.

판은 오필리아에게 그녀가 지하왕국의 공주였으나 인간세계로 나왔다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며, 다시 공주로 돌아가기 위한 방법으로 세 가지 미션을 제안한다.

그와 함께 미션의 힌트가 그려지는 마법 동화책과 어디든 그리는 대로 문이 생기는 마법 분필, 충실한 안내자인 요정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한다.

이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은 역사적 비극과 판타지의 결합을 통해 판타지의 효과를 극대화했다는 점이다.

단순히 상상력의 나래를 펼친 것이 아니라 판타지를 통해 비참했던 역사를 더욱 생생하게 고발하고 있는데 바로 이 점이 영화를 그 어떤 시대극보다 진실하게 다가오게 한다.

그렇다고 판타지가 약한 것도 아니다.

'헬보이' '블레이드2' '미믹'으로 특수효과 표현에 재능을 과시한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해리 포터' 시리즈 못지않은 판타지를 펼치며 볼거리를 제공했다.

눈썰미 있는 관객이라면 전체적인 디자인이나 분위기에서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체취를 느낄 수 있을 듯.
'위대한 유산' '이투마마'를 통해 고풍스럽고 우아하며 신비한 미장센을 선보였던 쿠아론이 영화의 제작지휘를 맡았다.

결코 예쁘진 않다.

영화 속 판타지는 모두 암울하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기품이 느껴진다.

내전은 모두를 피폐하게 만든다.

그리고 현실 도피를 꿈꾸게 한다.

양복 재단사 남편이 죽자 생계를 위해 피도 눈물도 없는 군인을 새 남편으로 선택한 어머니나 새아버지가 무서워 동화와 상상의 세계로 점점 빠져드는 오필리아나 힘겨운 현실을 피하고 싶어하는 마음은 똑같은 것이다.

오필리아에게 주어진 미션 세 가지는 각각 용기와 인내, 희생을 요구한다.

하나같이 어려운 임무. 그러나 비참한 현실에서 탈출을 꿈꾸는 오필리아에게 지하왕국 공주가 될 수 있다는 판의 이야기는 달콤한 유혹을 넘어 절실한 소원이다.

그래서 소녀는 담대할 수 있고 의연할 수 있다.

거대한 도깨비, 눈이 손에 달린 괴물과도 맞설 수 있는 것이다.

영화는 신비한 전설과 마법, 요정이 숨을 쉴 것 같은 깊은 숲을 무대로 목숨 걸고 투쟁하는 반군의 모습과 역시 위험을 무릅쓰고 임무 수행에 나서는 오필리아의 모습을 교차해 보여준다.

그것을 통해 오필리아의 판타지가 결국은 비정한 현실을 은유하는 수단임을 말한다.

왜 새아버지와 결혼했느냐고 묻는 오필리아에게 엄마는 답한다.

"너도 어른이 되면 알겠지만 현실은 동화 속 세상과 달라."
'판의 미로'는 환상의 세계를 선사하지만 사실은 비참한 현실을 온몸으로 끌어안아야 했던 한 소녀의 비극을 펼치며 마음을 너무나 아프게 한다.

극장을 나서면서 스페인 내전의 참상이 머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다큐멘터리를 능가하는 영화의 힘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30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서울연합뉴스) 윤고은 기자 pretty@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