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가 있는 갤러리] 박몽구 '정취암에 가서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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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공기를 잘 다린 무명 가르듯 흠집 없이 깨뜨리는 도량석 목탁 소리에 저절로 눈이 떠졌습니다. (…)
객사 아랫목에서 누르스럼한 호박이 제 맛을 들이는 소리,법당에 올릴 무말랭이 허리 뒤트는 모양새가 왜 이리 살붙이 같을까요. 새벽 예불 때 백팔배 절반 못 가 허리 무릎 펼수 없을 즈음에야 내 마음에 큰 빗장이 걸렸는지 들여다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둔철산 봉우리 너머 떠오르는 해의 뺨이 막 붓질을 마친 빨강의,댓돌 위 흰 고무신에 고인 가을 겨울 빛이 유난히 반질거렸습니다. 그날 밤에는 구상나무 숲에 웅크린 채 우는 살쾡이 울음이 더없이 정겹게 들렸습니다. 몇 년쯤 그리운 얼굴 잊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스님,차 한잔 마시고 가란 말밖에 달리 말씀 없으신 스님,둔철산을 넘어 내 속까지 비추는 해는 산문 밖에서도 똑같이 뜰까요. (…)
- 박몽구 '정취암에 가서 5' 부분
산이 끝나는 곳에 암자가 있다. 암자에 깃들어 사는 스님은 말이 없다. 호박이 제 맛을 들이는 소리와 무말랭이 허리 뒤트는 모양새가 아름답게 어우러지는 곳. 몇 년쯤은 그리운 얼굴까지 잊을 수 있을 것 같은 곳이다. 그곳의 해는 이제 막 마음의 빗장을 열려는 나그네 속내를 파고든다. 그동안 무엇을 희망했고 무엇을 얻었나. 또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인가. 한 해의 막바지로 가고 있는 이즈음 적막한 암자를 한번쯤 찾아가봐야 할 것 같다.
이정환 문화부장 jhlee@hankyung.com
객사 아랫목에서 누르스럼한 호박이 제 맛을 들이는 소리,법당에 올릴 무말랭이 허리 뒤트는 모양새가 왜 이리 살붙이 같을까요. 새벽 예불 때 백팔배 절반 못 가 허리 무릎 펼수 없을 즈음에야 내 마음에 큰 빗장이 걸렸는지 들여다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둔철산 봉우리 너머 떠오르는 해의 뺨이 막 붓질을 마친 빨강의,댓돌 위 흰 고무신에 고인 가을 겨울 빛이 유난히 반질거렸습니다. 그날 밤에는 구상나무 숲에 웅크린 채 우는 살쾡이 울음이 더없이 정겹게 들렸습니다. 몇 년쯤 그리운 얼굴 잊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스님,차 한잔 마시고 가란 말밖에 달리 말씀 없으신 스님,둔철산을 넘어 내 속까지 비추는 해는 산문 밖에서도 똑같이 뜰까요. (…)
- 박몽구 '정취암에 가서 5' 부분
산이 끝나는 곳에 암자가 있다. 암자에 깃들어 사는 스님은 말이 없다. 호박이 제 맛을 들이는 소리와 무말랭이 허리 뒤트는 모양새가 아름답게 어우러지는 곳. 몇 년쯤은 그리운 얼굴까지 잊을 수 있을 것 같은 곳이다. 그곳의 해는 이제 막 마음의 빗장을 열려는 나그네 속내를 파고든다. 그동안 무엇을 희망했고 무엇을 얻었나. 또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인가. 한 해의 막바지로 가고 있는 이즈음 적막한 암자를 한번쯤 찾아가봐야 할 것 같다.
이정환 문화부장 jhlee@hankyung.com